이런 詩가 있다…"별일 없지요? 네, 이쪽도 아직은 별일 없어요"
풀꽃을 사랑한 시인 나태주
별·달팽이 등 소박한 것들로
노랫말처럼 가벼운 시 써내
한 시인의 산문집 파일을 인쇄소에 넘기고 나서 그 시인이 머무는 문학관을 찾았다. 세상에 흰 눈이 도톰하게 쌓인 날이다. 상처 입은 오목한 피부에 눈송이가 떨어져 깨어 있음에 소름 돋은 새벽이다. 서울에서 일행과 모여 차를 타고 공주에 갔다. 올해 거의 여든이 된 시인의 신작 홍보 영상 촬영을 하기 위해서다. 시인이 직접 가꾼 뜰에 핀 봄꽃들은 볼 수 없겠지만 풀꽃 같은 시인을 뵐 생각에 어깻죽지가 꿀벌처럼 들썩였다. 초고를 받고 마감하기까지 시인과 나는 우편과 전화를 자주 나눴지만 얼굴을 마주한 건 정확히 두 번째였다.
두 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곳은 풀꽃문학관. 나무로 지어진 간이역을 닮아 쉬어가고 싶은 곳이다. 시인은 사탕처럼 동그란 얼굴로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오전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뜨끈한 칼국수를 먹고 한적한 찻집에서 시인은 말했다. “이번 책을 읽으며 사람들이 배우는 것보다 느끼면 좋겠어요.”
시인의 시가 수놓인 벽화 거리를 지나 다락방이 있는 당신의 집에 들렀다. ‘시인의 집’ 앞에는 칠이 벗겨진 자전거 한 대가 놓여 있었고, 집 안에는 오래된 서적과 그림이 그득했다. 시인은 올해 확장해 완공될 풀꽃문학관에 그것들을 기증할 것이라고 했다.
오후 사진 촬영을 마친 후 문학관 둘레를 몇 바퀴 돌다가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보지 못한 푯대를 발견했다. 그 푯대에 적힌 부탁을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궁금해 물었다. “‘디딤돌만 밟아주세요’라고 푯대에 적혀 있는데요. 빈 땅에서 자랄지 모르는 풀꽃들을 위한 배려시지요?” 시인은 “그것을 모르고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꽃을 피울지도 모르는데….” 작고 낮고 연약한 것들을 살뜰히 살피는 그런 시인이 헤어질 때 시집 한 권을 선물해주셨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는 내가 나태주 시인께 직접 받은 첫 시집이다. 어떤 책은 그 책을 쓴 작가의 손길이 직접 닿아 독자에게 소중한 것이 되곤 하는데, 당신에게 직접 받은 시집이 내겐 어느 날 책장을 정리할 때 마지막까지 꽂혀 있는 책 중 한 권이 될 것이다. 이 시집의 ‘시인의 말’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두 손에 아직도 시가 쥐어져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요!” 그리고 당신은 시 ‘나에게’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석/ 가짜 보석/ 쓰레기// 그중에 지금껏 내가 쓴/ 시들은 무엇일까?”(‘나에게’ 전문)
공주에서 서울로 돌아온 날 밤, “선생님, 저 안아주세요”라고 아이처럼 말한 나와 시인의 안개꽃 같은 품을 떠올리며 이 시집을 펼쳤다. 1년 전 도서관에서 읽은 시집이지만 그때 읽은 느낌과 자못 달랐다. 이 시집은 2020년 2월부터 2022년 2월까지 시인이 쓴 176편이 담겨 있는데, “네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예쁘게 살아라/ 그게 사랑이란다”(‘사랑을 보낸다’ 부분), “지금 어디에 있어요?/ 누구하고 무엇 하고 있나요?/ 예전엔 그렇게 물었는데// 요즘은 다만/ 이렇게 묻고 말한다// 별일 없지요?/ 네, 이쪽도 아직은/ 별일 없어요”(‘안부 전화’ 전문)와 같은 보통의 언어로 쓰여 있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를 뵙고 난 후 그의 시를 다시 읽고 알게 된 것이 있다. 그의 말처럼 그의 시는 ‘시를 모르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시’다.
당신의 시는 비장하지 않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낯선 언어를 찾아 쓰지 않아서 읽으려 애쓰지 않을 수 있다. 당신은 몸으로 겪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풍경에서 시를 길어올려 써 내려가, 우리는 당신의 시를 진실하게 느낄 수 있다. 당신의 시에는 차갑고 화려한 물질이 넘치지 않는다. 작고 나직하고 연약한 생명이 숨 쉰다. ‘별’ ‘이불’ ‘사랑’ ‘꽃’ ‘눈물’ ‘민달팽이’ ‘외딴집’ ‘벗’ ‘아이’ ‘아내’ ‘할아버지’ 등 부드러운 살결과 숨결이 느껴지는 단어가 깃들어 있다.
당신은 자신의 시를 졸렬하다고, 거창하지 않다고 말했다. 별것 아닌 쉬운 시지만 크게 쓴다고 말했다. 나는 휴대전화 메모장에 몇 줄을 적었다.
“당신의 시가 어떤 모양이든 당신의 존재 자체가 시이기에 당신이 쓰는 시는 시가 될 수밖에 없다. 자신만의 장르를 꾸준히 만들고 지켜간 시인이 오래 기억될 터인데, 당신이 만든 시 장르는 무엇일까? 노랫말처럼 쉽게 읊조릴 수 있는 시가 점점 사라지는 시대, 자신이 쓴 모든 시를 머리로 외지 않고 입술로 술술 낭독할 수 있는 시인이 얼마나 있을까? 당신은 자신이 쓴 시를 막힘없이 읊조린다. 독자도 당신의 시를 읊조린다. 당신이 일군 장르는 ‘읊을 수 있는 시’다.”
김성태 김영사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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