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의 추억 [안병욱 칼럼]
안병욱 |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어처구니없게도 손바닥 부적 王(왕) 자가 실제 상황이 돼버렸다. 선거제의 이율배반 틈새에서 이뤄진 황당한 일이다. 그로 인해 전대미문의 국정 파행이 계속되고 있다. 그래도 이번 4월 총선으로 파탄을 향해 치닫는 윤석열 정권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견뎌왔다. 사회는 선거를 통해 단락지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내 낙관적이었던 기대치는 민주당 후견 팬덤의 광풍에 휩쓸려버렸다.
개인적으로 역대 선거 역사를 되새기게 하는 기억들이 있다. 첫 기억은 초등학생 때, 그러니까 1960년 이승만이 3·15 부정선거를 획책할 때의 한 장면이다. 3·15 선거 며칠 전인 3월 초순 어느 날 면서기와 순경이 동네 사람들을 모두 모아 투표 연습을 시켰다. 날씨가 쌀쌀했던 터라 동네 어귀 양지바른 곳에서 진행했다. 면서기는 어떻게 기표, 아니 어디에 찍어야 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한 뒤 노인 몇 분을 앞으로 모셔서 붓 대롱으로 인주를 찍어 투표용지에 기표하는 연습을 시켰다. 불려 나온 분들은 대통령으로 이승만, 부통령으로는 이기붕 난에 붓 대롱을 꾹 눌러 찍었고, 면서기는 이 투표지를 모인 분들에게 들어 보이면서 딱 맞게 찍었는지 물었다. 모두에게 확인받은 다음 칭찬을 늘어놓으면서 다 같이 손뼉을 치게 했고, 당사자들은 뿌듯한 표정으로 우쭐했다. 어릴 때 봤던 기억이라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승만 나라를 세우기’의 한 장면이었다.
군 복무 때는 유신헌법 제정 국민투표를 치렀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별안간 계엄령을 발포해 헌법을 정지하고 국회를 해산한 뒤 이른바 유신체제를 강행하는 국민투표를 시행했다. 병사들은 부재자 투표를 했는데 주소지에서 투표지가 배달되는 대로 기표소에서 기표한 후 반송 봉투에 넣어 중대장에게 제출했다. 나도 투표한 다음 반송 봉투에 넣어 건네자, 이를 받아든 중대장은 봉투 속의 내 투표지를 꺼내서 반대란에 기표한 것을 보더니 그대로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서랍에서 다른 투표지를 꺼내 찬성란에 직접 기표한 뒤 반송 봉투에 넣어 처리했다. 이어 중대장은 부대원을 집합시켜 ‘너희들 양식을 믿고 각자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게 했는데 지금 개중에는, 양식을 믿을 수 없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자들이 있다’라고 질책한 후 그때부터 투표는 중대장이 투표지의 반대란을 손바닥으로 덮어 가리고 내밀면, 병사들은 투표지의 한쪽 남은 찬성란에 기표해야 했다. 권위주의 시기 ‘군인 표’는 모조리 통치자 몫이었다.
1985년 12대 ‘2·12 총선’을 겪으면서 선거의 의미와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학살 후 1981년에 관제 야당을 만들어 치른 선거에서 들러리 정치인들을 뽑아 구성한 허수아비 국회를 운영했다. 그러나 4년이 지나 다시 치르는 1985년 2·12 선거는 이전처럼 요식행위로 넘기기가 어려웠다. 그 때문에 야권에 불리하도록 편파적 조건을 만들고 선거운동 유세에 유권자들의 참여와 관심이 가지 않도록 갖은 꼼수를 다 부렸다. 당시 관제 야당 참여를 거부한 정치인들은 독자적인 신한민주당을 겨우 선거일 20일을 앞두고 창당할 수 있었다. 이런 불리한 여건에서 치러야 하는 2·12 총선을 두고 대다수 반정부 식자층들은 어차피 들러리 선거로 전두환 정권을 용인해주는 꼴밖에 안 될 테니 차라리 선거를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낮은 투표율을 통해 반정부 의사를 표명하자는 궁여지책이었다. 당시 나도 주위 동료들과 함께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의견과 달리 대학의 운동권 조직은 선거투쟁을 표방하면서 적극 참여를 주장했다.
2·12 총선을 군사독재 용인해주는 선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분위기가 궁금해 옛 서울고 터에서 열리는 합동 유세장으로 갔다. 광화문 지하도를 통해 쭈뼛거리면서 신문로 방면 출구로 나오는 순간, 갑자기 다른 세상에 들어선 느낌이 들면서 등줄기에 전율이 일었다. 입을 꼭 다문 표정의 유권자들 행렬에 섞여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시곗바늘 움직이듯이 시대가 바뀌는 듯했다. 그렇게 역사학도로서 세상이 변하는 순간의 역사 현장을 목격했다. 2·12 총선에서 일상의 민중이 행사한 한 표 한 표가 뭉쳐 천둥 벼락처럼 살인정권의 심장을 내리쳤다. 전두환 정권은 살인군대의 폭력을 가지고도 버티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끝내 6월 항쟁에 무릎 꿇었다. 새삼 민심의 마법같이 오묘한 위력을 되새긴다.
1987년 6월 항쟁은 반독재운동의 승리를 확인할 틈도 없이 곧 정치인들의 시간으로 넘어갔다. 권위주의 청산과 사회개혁의 시간이 아니라 정치적 우상을 세우는 선거판의 시간이었다. 김영삼 김대중이라는 두 보스를 매개로 분열하는 선거판이었다. 민주화를 갈망하던 시민들이 양 김의 팬덤에 휩쓸리는 순간 좀비처럼 방향 의식을 상실했다. 이때의 유권자는 2년 전 2·12 총선의 민중이 아니었다. 민중에서 팬덤이 되는 변질은 지금도 그 후유증에 시달려야 하는 뼈아픈 역사가 되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이 기적적으로 승리했다. 애초 노무현에게 힘겨웠던 선거였으나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한 후 여야 간 비등한 양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선거 하루 전 정몽준이 단일화 합의를 파기하고 지원 협력을 철회해 버렸다. 이에 조선일보 같은 경우 신이 나서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라는 사설 등을 앞세워 ‘이제 유권자는 단일화를 전제로 판단했던 선택 기준을 뒤집어야 한다’고 노무현 반대를 선동했다. 이런 망동에 분노한 청년들은 오히려 부모들과 주위 소극적이던 자들에게 노무현 지지를 설득하면서 투표장으로 끌어내는 열성 운동원 역할을 했다. 그렇게 유권자들은 투표장으로 몰려가 박빙의 판세를 승리로 반전시켰다. 노무현이 보여준 상식을 저버리지 않는 의연한 정치적 행보에 유권자들의 신뢰가 쌓여 성취한 승리였다. 노무현은 한편의 잘 만든 윤리 드라마 주인공처럼 승리했다.
이번 4월 총선이 왕비(王妃)의 귀환을 위한 한마당이 되고 말 것인가. 아직까지는 민주당 행보에 달려 있다. 지금 민주당은 비판 여론을 향해 공천 혁명이라고 주장한다. 주장대로 숙청의 친위 쿠데타가 아닌 공천 혁명으로 평가받을 길도 남아 있다. 그 길을 따라 책임 있는 분들이 진정성 있는 희생을 각오한다면 노무현의 선거 혁명을 또 한차례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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