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청년들 끌어당긴 창작 허브…생활인구 분산전략 통했다
소도시 실험공간 '티에 리외'
보조금 지급해 인프라 강화
엔지니어·치료사·예술가…
희귀식물 키우고 기술 배워
韓 생활인구 늘어날 지역
양양·단양 가능성 엿보여
◆ 국민보고대회 ◆
지난달 초 찾은 시골 마을 고메스라빌은 젊은 청년들과 예술가들이 모여 도시 못지않은 활기가 넘쳤다. 파리 도심에서 40㎞ 떨어진 인구 1500명 남짓의 작은 마을이 탈바꿈한 건 이곳에 버려졌던 온실이 프랑스 정부의 '티에 리외' 프로그램을 통해 2020년 농업과 예술을 융합한 실험공간으로 새 단장하면서다. 6000㎡ 규모의 온실에는 양봉 업체, 천연 화장품 제조 업체, 희귀 식물 재배 업체와 함께 플로리스트, 미술치료사, 도예가를 비롯한 15명의 회원이 입주해 있다. 이곳에선 주민들이 요가 수업과 드럼 연습을 진행하거나, 지속가능 농업을 실험하기도 한다.
수채화 화가 아무드 샹투 씨(68)는 청동 조각가인 아내와 함께 2년 전 보드르빌의 온실에 작업실을 꾸렸다. 파리 근교 도시 샤빌 출신의 아가테 빌리앙 씨(28)도 지난 1월 이곳으로 이주했다. 4년간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하던 그는 '보드르빌의 온실'에 자신의 이름을 건 식물 모종 가게를 차렸다.
온실 코디네이터인 넬리 르볼뷔송 씨는 "저마다의 아이디어를 가진 이들이 프로젝트를 시험해볼 기회를 최대한 지원해주고 연구·탐험할 기반을 만들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인구 9만명이 사는 파리 외곽 공업지구 낭테르에는 '엘렉트로랩(electrolab)'이라는 '티에 리외'가 운영되고 있다. 엘렉트로랩은 고등학생부터 80대 퇴직자까지 약 300명의 정규 회원이 과학·기술·산업 지식을 공유하는 1500㎡ 규모의 작업장(아틀리에)이다. 2010년까지 전기와 난방도 안 되는 버려진 건물이었지만 주민들이 수집해 오거나 기부받은 각종 기계장비로 채워졌다. 이곳에선 누구나 전문가와 함께 3D 프린팅이나 레이저 커팅 같은 기술을 배울 수 있다.
현재 프랑스 전역에는 보드르빌의 온실, 엘렉트로랩과 같은 티에 리외가 3500곳까지 늘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프랑스는 티에 리외를 통해 지역 인프라스트럭처를 강화하고 인구 유출을 막고 있다. 주무부처인 지역결속국가청(ANCT)의 마르크 라제 씨는 "티에 리외에 3년간 중앙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지역 구성원들이 직접 이사를 맡아 경영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며 "상업적 성취보다도 주민들의 행복을 영위하는 데 궁극적인 정책 목표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서도 생활인구(체류인구)를 늘려 지역 소멸을 막고 수도권 과밀을 완화하기 위해선 지방 중소 도시에 티에 리외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거주지는 대도시에 두더라도 지역에서 본업과 구별되는 새로운 여가나 경제활동을 시도해 보도록 장려하는 방식이다. 저출산으로 절대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기존 정주인구(주민등록인구) 중심의 인구 유입 정책은 '주변 인구 빼앗기'에 불과하다는 문제의식에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도시인구집중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평균 수준으로 하락할 경우 합계출산율이 0.414명만큼 높아질 것으로 분석됐다. 지난해 0.72명이던 합계출산율이 1.13명까지 껑충 뛰게 된다. 이는 한국은행이 제시한 출산율 영향 지표 개선 시나리오 가운데 가장 효과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서피비치가 자리한 강원도 양양과 농촌 유학 허브로 떠오른 충북 단양의 성공 사례를 볼 때 국내에서도 티에 리외가 활성화할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양양과 단양의 정주인구는 각 3만명 수준이지만 새로운 여가나 생산활동을 위해 지역에 잠시 머무르는 생활인구는 각각 47만명, 27만명에 달한다. 권인혜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전문연구원은 "프랑스 티에 리외의 핵심은 구성원들이 상호작용하며 새롭게 다양한 프로젝트를 발전시킬 수 있는 인적 생태계에 있다"며 "투입할 수 있는 인력이나 자원이 한정된 국내 농어촌 지역에 필요한 활동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티에 리외(tiers lieux)
미국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가 제시한 개념으로, 제1의 장소인 집, 제2의 장소인 일터·학교 외에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새로운 공간.
[고메스라빌·낭테르(프랑스) 우수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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