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를 '파묘'하니 천만 관객 보인다
전작 '검은사제들' '사바하'
예기치 못했던 불행으로
관객들 공포·분노 일으켜
기독교 세계관에 불교 섞어
의문의 초자연 현상 재해석
익숙한 장소와 동물들까지
저주의 상징으로 바꿔 충격
"한기가 엄청나네." 장재현 감독의 영화 '파묘'에서 염장이 영근(유해진)이 무덤가에 서서 툭 내뱉는 말이다. 장 감독의 영화는 관객의 심연까지 냉기로 가득 채운다. 3월 내 '천만 관객' 돌파가 확실한 영화 '파묘'뿐 아니라 '장재현 오컬트 3부작'을 이루는 '검은 사제들' '사바하' 역시 서늘하다.
오컬트(occult·초자연적 혹은 주술적) 영화란 초자연적 영적 현상을 다루는 공포물의 하위 장르를 뜻한다. 장재현 감독의 오컬트 영화는 왜 매번 돌풍을 일으킬까. 544만명 관객을 만난 2015년작 '검은 사제들', 239만명을 모은 2019년작 '사바하'에 이어 이번 '파묘'까지의 연속 흥행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장재현 오컬트 3부작을 다시 보며 공통분모를 추출해봤다.
"그들은 세상 곳곳에 숨어 있지. 묵시록에 있듯, 그들은 전쟁과 재난, 모든 참사 그 가운데 있다."
영화 '검은 사제들'의 첫 대사다. 프란치스코회 구마의식(장엄의식)을 다룬 이 작품에서 '그들'은 악을 뜻한다. 악령에 사로잡힌 부마자(귀신 들린 아이)인 영신(박소담)의 몸에서 악령을 제거하는 일은 세계사의 숨은 트라우마를 제거하는 일과 같다. 이성과 합리의 세상에서 왜 인간에겐 뜻하지 않은 불행이 개입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는 영화다.
이때 '검은 사제들'에서 장재현 감독은 등장인물의 트라우마를 서사 진행에 적극 활용하는 전략을 쓴다. 명동의 한 세탁소에서 뇌사에 빠진 영신에게 가하는 두 신부의 구마의식 과정에서, 감독은 보조사제 최부제(강동원)의 유년 시절 9세 여동생을 구하지 못해 사망한 트라우마를 개입시키기 때문이다. '5000살짜리 악령'을 결국 제거하면서 사적 트라우마도 해소된다. 관객은 이로써 충분히 영화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사는 세계 속 불행의 원인을 염탐하게 된다.
그런데 장재현식 '트라우마 전략'은 다른 두 영화에서도 전면에 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사바하'에서 정나한(박정민)은 자신이 강원도 영월의 1999년생 여아를 살해하면서 느꼈던 트라우마를 어머니가 불러주는 어린 시절의 자장가 소리를 상상하면서 해소하려 한다. 뿌리 깊은 죄의식이 해결 불가능한 트라우마로 작용한 것이다. 미륵으로 변한 직후의 '그것'은 나한의 아킬레스건이었던 모친의 자장가를 불러주면서 나한의 선한 변심에 개입한다.
'파묘'는 더 나아가서, 관객 심연의 트라우마를 일깨운다. 장 감독이 개봉 직후 인터뷰에서 "우리 땅엔 과거 상처와 트라우마가 많다. 발톱의 티눈을 뽑듯 (트라우마를) 파묘해버리고 싶었다"고 말한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한국인 내면에 가장 육중하게 자리 잡은 지배적인 콤플렉스는 '일본 제국주의'이고 그 트라우마는 대(代)를 이어 상속된다.
극중 상덕(최민식)은 말한다. "핏줄이다. 죽어서도 절대 벗어날 수도 없는, 같은 유전자를 가진 육체와 정신의 공혈(共血) 집단." 이건 단지 극중 한 집안만의 피붙이 문제가 아니며 '공혈 집단'은 이 영화를 보는 한국인 관객 전체가 된다. 일본 황군에 동조했던 조부가 빙의한 박지용(김재철)의 '대동아공영권' 연설, 범의 허리를 끊은 여우의 쇠말뚝 등은 한국인이 겪었던 공포와 분노의 트라우마와 연결된다.
또 MZ무당 화림(김고은)이 어린 시절 일본에서 일본 귀신을 만났고, 그때의 트라우마로 일본 귀신을 무서워 하기에 벌어지는 일들도 '파묘'에 자세하다. 장재현식 오컬트 영화는 이처럼 트라우마와 친연적이다.
장재현 감독 영화를 특징짓는 수사는 '한국형 오컬트'다. 우리가 그 실체나 세부사항을 잘 모르는 초자연적 현상을 재해석하는 작업에 장 감독은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왔다.
'사바하'는 신흥종교의 이단성을 다루는 작품이다. 극중 불교 신흥종교인 사슴동산뿐 아니라 아가페수녀회, 모세재림교 등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지만 정확히는 알지 못했던 사이비 종교를 해부한다. 이단종교 네트워크, 밀교의 시방카(악귀를 잡는 사천지왕) 등도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종교 개념들이다. 또 '검은 사제들'에선 장미십자회 열두(12)형상도 구마에 관심을 가진 준전문가가 아니라면 알기 힘들던 초자연적 현상들이다.
두 영화는 하나의 선으로서의 종교를 내세우기보다는 여러 종교적 색채를 섞어 '신앙에는 절대적 기준이 없음'을 주장한다. '검은 사제들'은 천주교(기독교) 영화이지만 무당의 굿판과 연계된다. "예수께서 가라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 속으로 들어갔다"(마태복음 8장 32절)에 근거하는 이 영화에서 최부제와 강신무당이 서로를 알아보는 장면은 종교의 경계를 넘나든다.
'사바하'는 불교 영화에 가깝지만 동시에 성경에 기댄다. 신약 마태복음 2장 16절에 나오는 헤롯왕의 2세 이하 아기 살육사건을 모티브로 삼기 때문이다. '사바하'의 '그것'이 정나한에게 "나는 너희들이 피 흘릴 때 같이 울고 있는 자다"라는 말은 성경 속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를 떠올리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깨달음의 부처가 취한 자세를 하고 앉아 전법륜인, 시무외인, 항마촉지인 등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수인이란 양쪽 손가락으로 깨달음을 표현하는 불교식 손동작을 말한다.
'파묘'는 무속, 풍수, 염, 가위눌림, 빙의 등 초자연적 현상을 버무렸다. 극중 화림이 불 속에 손을 넣어 재를 얼굴에 바르는 대살굿, 악지 중의 악지를 파헤치는 지관(地官)이 엮였다. 그런데 한 팀을 이루는 염장이는 개신교 크리스천이다. 이런 가운데 장재현 감독이 모태신앙을 가진 '교회 집사'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장재현 영화에 등장하는 '공간'은 점차 확장돼 왔다. 3부작 속 무대는 서울 명동과 정동이었다가('검은 사제들'), 강원도 영월 중심의 동서남북 소도시인 태백·정선·제천·단양으로 이어졌고('사바하'), 이번 '파묘'에서는 한반도 전체로 확대된다. 쇠침이 박힌 묫자리의 위도와 경도를 태백산맥 정중앙인 '삼팔삼사일칠, 일이팔삼이팔구(383417, 1283289)'로 설정함으로써 '파묘' 관객은 한반도 지도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영화를 이해하게 된다.
이때 세 공간은 모두 관객에게 낯익은 공간이다. 관객이 살아가는 현실의 땅에서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벌어졌다는 설정은 더 큰 공포감을 준다.
낯이 익은 건 영화 속 장소만이 아니라 등장하는 동물도 마찬가지다. '검은 사제들'에서 최부제를 공격하는 사냥견, 몰려든 고양이, 까마귀는 무력한 사물이 아니라 모두 사령(邪靈)의 대체물이다. '사바하'의 쓰러지는 소떼, 울어대는 염소들, 발목을 무는 뱀, 피 흘리고 쓰러진 사슴, 사육장의 코끼리, 창문에 날아든 새는 불길한 징조로 기능한다. '파묘'의 여우떼도 저주받은 땅을 암시한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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