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외치는 트럼프 ‘나는 너희들의 정의이니라’ [특파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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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1941년 진주만 급습 때 연합국 지도자들 중 충격을 받은 게 아니라 안도했다고 고백한 이들이 적어도 두명 있다.
그래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해 3월 연례행사인 보수정치행동회의에서 "난 여러분의 정의다", "난 여러분의 응징이다"라며 스스로 복수의 화신임을 선언한 것은 핵심을 찌른 것이었다.
지지자들에게는 트럼프의 그 어떤 정책보다 복수가 중요한 듯하다.
그들에게는 공화당 경선 주자들 중 가장 철저한 복수를 약속한 트럼프를 지지하는 게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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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본영 | 워싱턴 특파원
일본의 1941년 진주만 급습 때 연합국 지도자들 중 충격을 받은 게 아니라 안도했다고 고백한 이들이 적어도 두명 있다. 미국 전쟁장관 헨리 스팀슨은 진주만이 폭격당하고 있다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화에 “첫 느낌은 안도감이었다”고 일기에 썼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회고록에 그날 안도와 감사의 마음으로 잠들었다고 기록했다.
두 사람 눈에는 앞날이 명확해 보였기 때문이다. 2차대전 참전을 놓고 머뭇거리던 ‘잠자는 사자’가 마침내 전쟁에 뛰어들면서 그들의 고민이 해결된 것이다. 대개 이런 상황이라면 잠자코 있지 않겠지만 특히 미국인들은 당하고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9·11 뒤 중동을 쑥대밭으로 만든 ‘테러와의 전쟁’과 10년에 걸친 오사마 빈라덴 추격전도 그런 기질을 보여준다. 2011년 5월1일 한밤중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정의가 실현됐다”며 빈라덴 사살을 발표한 직후 백악관 주변에 몰려든 수천명의 표정에서는 인생 최고의 환희가 묻어났다.
미국인들에게 복수, 응징, 심판, 정의, 처벌은 구분이 쉽지 않은 단어들이다. 정의란 고상한 가치를 표현하기보다는 단순히 죄지은 자를 벌하는 것을 가리키는 데 많이 쓰인다. 미국은 이른바 선진국들 중에 드문 사형 존치국이다. 초현실적인 수백년 징역형이 선고되는 상황도 그들이 복수에 얼마나 가치를 두는지 보여준다. 할리우드 영화의 수많은 주인공들이 복수에 목마른 인간들인 점도 ‘복수 문화’를 상징한다. 이런 문화에서 절제, 인내, 관용 같은 것은 미덕으로서 강조되지 않는다.
그래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해 3월 연례행사인 보수정치행동회의에서 “난 여러분의 정의다”, “난 여러분의 응징이다”라며 스스로 복수의 화신임을 선언한 것은 핵심을 찌른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복수와 응징을 입에 달고 다녔다. 지난달 말 열린 올해 보수정치행동회의에서는 “승리가 우리의 궁극적 복수”라고 했다.
트럼프가 말하는 복수는 조 바이든 대통령 처벌과 연방공무원 대량 해고 등을 뜻한다. 지지자들에게는 트럼프의 그 어떤 정책보다 복수가 중요한 듯하다. 선거를 도둑질(트럼프의 거짓말이다)한 자들, 호의호식하며 잘난 체하는 세계주의자들, 중국의 성장을 돕거나 방치한 자들, 자신들을 시골 무지렁이라고 깔보는 자들에 대한 되갚음의 기회가 절실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공화당 경선 주자들 중 가장 철저한 복수를 약속한 트럼프를 지지하는 게 당연하다.
유세장에서는 트럼프를 숭배하는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성경이 묘사하는,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말하는 ‘복수의 하나님’에 대한 복종 같은 것이라고 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는 최근 보수정치행동회의 연설에서 11월5일 대선일은 “심판의 날”이 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위기를 지지자들이 그들의 위기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능력도 갖고 있다. 그가 복수를 입에 올리기 시작했을 때는 성관계 입막음 돈과 관련된 뉴욕 검찰의 수사가 무르익는 시점이었다. 그는 “내가 아니라 여러분을 처벌하려는 것”이라며 지지자들과 운명 공동체를 형성했다.
트럼프는 익히 봐온 어떤 유형의 사람들과 비슷하다. 하나님의 곳간을 채워야 한다며 자기 배만 실컷 불리고 위기 때는 신도들을 앞세워 행패를 부리는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 말이다.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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