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는가?’…얄궂은 질문에 대한 충격적인 답변

최민지 기자 2024. 3. 14. 17:0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지금 가장 주목받는 일본의 젊은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27일 극장을 찾는다. 개봉에 앞서 언론시사로 공개된 영화는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 <우연과 상상> 등 탁월한 작품으로 넓고 깊어져 온 하마구치의 영화 영토를 한 뼘 더 깊고 넓게 한다.

주인공은 한적한 산골 마을에 사는 타쿠미(오미카 히토시)다. 8살 딸 하나(니시카와 료)와 산다. 두 사람의 일상은 늘 자연과 함께다. 타쿠미는 매일 나무를 패고, 샘물을 떠다 마을 우동집에 납품하며 생계를 꾸린다. 하나는 등하교길인 숲속을 매일 가로지르며 산벚나무, 낙엽송 따위의 나무 이름을 익힌다. 인근 숲에서 사슴 사냥꾼들의 총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긴 해도 대체로 평화로운 나날이다.

어느 날 마을에 글램핑장을 지으려는 사람들이 도쿄에서 찾아온다. 이들은 글램핑장이 마을 경제에 도움될 거라 말하지만, 주민들은 글램핑장 오수가 샘물을 더럽힐까 걱정한다. 문제 제기가 이어지자 회사는 묘수를 낸다. 마을의 ‘심부름꾼’ 타쿠미에게 글램핑장 관리인 자리를 제안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듣고 나면 ‘자연을 지키려는 인간’ 대 ‘파괴하려는 인간’ 간 대결 구도가 핵심 줄기처럼 보인다. 이 구도 안에서 ‘악’은 당연히 파괴하려는 쪽이다. 영화 초반부 그려지는 주민 설명회 장면에서 도쿄에서 온 직원 타카하시(코사카 류지)와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는 분명 빌런이다. “오수 5인분 정도는 괜찮지 않냐”는 도시민의 무신경한 말은 주민과 관객의 신경을 긁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하마구치 감독의 영화가 늘 그렇듯 줄거리를 늘어놓는 것만큼 작품을 납작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물과 인물들과 미묘한 행동과 감정의 변화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같은 주민들의 말은 자연의 섭리와 ‘상류’의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지만, 영화는 전통적 의미의 ‘생태 드라마’와 거리를 둔다. 도쿄에서 온 직원들이 지닌 도시민의 매끈한 매너가 타쿠미에게는 없다. 그는 초면인 직원들에게 대뜸 반말을 하고 동승자 양해 없이 담뱃에 불을 붙이는 사람이다. 얼굴은 늘 무표정하고 말수가 적다. 감독의 영화에서 늘 중요하게 다뤄지는, ‘자동차에서의 긴 대화’ 장면을 보고 나면 관객은 괴물 같던 도쿄 사람들에게 공감하게 된다.

영화 제목처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악은 없다’는 것이 감독의 메시지일까. 그러나 영화는 종반부에 이르러 모호하고도 충격적인 방향으로 돌연 핸들을 꺾는다. 이때부터 제목은 친절하기보다 얄궂은 질문이 된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고 누군가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당초 라이브 퍼포먼스 영상으로 기획됐다고 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 음악 감독인 이시바시 에이코의 공연에 쓸 무성의 영상에 이야기를 붙여 극영화로 만들었다. 적은 대사의 양이나 정적인 분위기도 작품의 기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름다운 겨울 산속 마을과 주민들의 평범한 일상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내내 신비롭고 기이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음악이나 장면을 거칠게 끊어내며 평화 속 불안을 심어두는 감독의 연출은 유효하다. ‘하마구치 팬’이라면 영화를 요목조목 뜯어보는 재미가 있겠다.

주인공 타쿠미 역의 오미카 히토시는 전문 배우가 아니다. 하마구치 감독은 전작 <우연과 상상>의 스태프이자 그 자신도 영화 연출가인 오미카의 불투명한 얼굴을 보고 캐스팅했다. 감독의 기대대로 오미카는 러닝타임 내내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혼란을 선사한다. 딸 하나를 연기한 니시카와 료 역시 첫 연기 도전이다.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이다. 3~5시간에 달하는 전작들의 러닝타임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한 관객들도 이번엔 도전해볼 만 한 106분이다. 12세 이상 관람가.

타쿠미(오미카 히토시)-하나(니시카와 료) 부녀는 한적한 산속 마을에서 자연과 함께 생활한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도쿄의 한 연예기획사는 타쿠미 부녀가 사는 마을에 글램핑장을 자으려 한다. 주민들이 오수를 염려하자 이들은 글램핑장이 지역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 설득한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