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정치권 막후 실력자’ 친이스라엘 로비단체, 가자전쟁으로 위기 맞나
총기협회와 함께 미국 정치권에서 가장 입김이 센 로비단체로 꼽히는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가 가자지구 전쟁 이후 전례 없는 정치적 도전에 직면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친이스라엘 단체인 AIPAC는 전쟁 발발 후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으며 정치권을 상대로 적극적 로비 활동을 펼치고 있으나,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목소리를 원천 차단하려는 이들의 공격적인 행동 방식에 대한 반발이 점차 커지고 있다.
AIPAC는 이스라엘의 전쟁에 비판적인 정치인에 대한 반대 캠페인에 1억달러(약 1320억원)에 이르는 돈을 쏟아붓는 등 자금력과 입김 면에서 미 정치권 최대 실력자로 불리는 로비단체다. 재미 유대인 7명에 의해 1947년 설립돼 1953년 정식 로비단체로 확대된 AIPAC은 웹사이트에서 “미국과 이스라엘 관계에 대한 초당적 지지를 강화하기 위해 활동하는 300만명 이상의 친이스라엘 미국인으로 구성된 전국 조직”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12일(현지시간) 미 워싱턴에서 열린 AIPAC 회의에는 공화당 소속 마이크 존스 하원의장과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등 주요 정치인을 포함해 1600여명의 양당 정치인과 기부자들이 참석하며 세력을 과시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도 화상 연설을 통해 “이 어려운 시기에 항상 이스라엘의 편에 서 줘서 감사하다”고 사의를 표했다.
뉴욕타임스(NYT) 보도에 따르면 이날 회의에선 이스라엘의 전쟁 방식을 비판한 민주당 의원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상영됐고, AIPAC 대표 하워드 코어는 이런 ‘반이스라엘’ 정치인을 축출하기 위한 자금을 더 모아달라고 촉구했다. AIPAC가 ‘표적’으로 지목한 민주당 현직 의원들의 대항마로 출마하는 2명의 도전자가 이날 회의 패널로 등장했다.
AIPAC는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그간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정치인들에 대한 낙선 운동을 벌이거나 상대 후보를 지원하는 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 때문에 한 번 이들의 눈 밖에 나면 정치생명이 위태롭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올 정도로 미 정치권의 막후 실력자 노릇을 해왔다. 최근 미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AIPAC이 올해 들어 하원과 상원 선거 캠페인에 최소 1900만달러를 이미 지출했고, 올해 안에 총 1억달러를 쏟아부을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AIPAC의 공격적인 실력행사 방식이 가자지구 전쟁 이후 점차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NYT는 보도했다. AIPAC가 네타냐후 총리를 비판해온 진보 성향의 친이스라엘단체 ‘제이 스트리트(J Street)’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등 최근 몇 년간 이 단체가 ‘친이스라엘’을 넘어 ‘친네타냐후’ 쪽으로 지나치게 우경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날 20개 이상 진보정치단체들은 AIPAC에 반대하는 연합 성격의 조직 ‘리젝트(Reject·거부하다) AIPAC’를 출범했다. 이들은 AIPAC의 표적이 된 의원들을 지지하는 ‘선거 방어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의원들을 상대로 이 조직의 자금 지원을 더이상 받지 않겠다는 서명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이 단체는 이날 성명을 통해 “우리는 AIPAC가 네타냐후의 가자지구 공격과 관련해 의회 내 반대 의견을 묵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것을 지켜봤다”면서 “이제 이스라엘에 백지 수표를 보내는 일에 반대하고 휴전을 지지해야 한다. 민주당 전체가 AIPAC을 단호히 거부해야 할 때”라고 촉구했다.
미 정치전문지 더힐은 이번 전쟁으로 가자지구에서 3만1000명 이상이 사망하는 등 민간인 피해가 급증하면서 민주당 내부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맹목적 지지’를 거부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발표된 이코노미스트 여론조사에서도 이스라엘보다 팔레스타인에 동조하는 민주당원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국 정치권에 초당적 영향력을 행사해온 AIPAC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례로 최근 AIPAC의 ‘표적’이 됐던 캘리포니아주 한국계 상원의원 데이브 민(민주당)은 지난 11일 오렌지카운티 하원의원 예비선거에서 승리했다. AIPAC은 민 의원의 당선을 막기 위해 450만달러를 쏟아부으며 반대 캠페인을 벌였으나 결국 민 의원이 승리하는 ‘이변’으로 이어졌다.
민 의원은 미국 정부 입장과 마찬가지로 요르단강 서안지구 내 유대인 정착촌 확대에 반대해 왔으나, 그 외 전쟁과 관련해 이스라엘에 특별히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는데도 AIPAC의 표적이 돼 논란이 일었다.
NYT는 이스라엘에 대한 ‘반사적인 충성심’이 강하지 않은 새로운 세대의 민주당 진보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며 “양당에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해온 친이스라엘 로비세력이 전쟁과 정치변화 속에서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고 짚었다.
빌 클린턴 정부에서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내고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회담 특사로 임명됐던 마틴 인디크는 “AIPAC가 정체성 위기에 처한 것 같다”며 “막강한 모금 능력에 가려져 있지만, 실제 그들의 상황이 매우 복잡해졌다”고 말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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