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의 정치 [말글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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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작가 겸 연출가이고 뇌병변 여성 장애인인 후배가 전화를 한 적이 있다.
'책과 잡지에 점자와 음성 녹음판이 있는 게 당연하고, 청인(비청각장애인)이 수화를 쓰는 게 당연한 세계, 모든 학교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통합교육이 이루어지고, 보건 의료가 무료로 누구에게나 보장되는 세계, 보편적 접근이란 말이 정확하게 그 말뜻 그대로인 세계, 장애인이 집이나 장애인 수용 시설에 감금되지 않고, 보호 작업장(장애인의 취업 기회 보장을 위해 마련한 별도의 시설)으로 밀려나지 않고, 저임금에 노동 착취를 당하지 않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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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작가 겸 연출가이고 뇌병변 여성 장애인인 후배가 전화를 한 적이 있다. “선배, 나도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니 글쓰기를 가르칠 기회를 주세요.” 며칠을 끙끙거렸다. 그는 첫 단어를 내뱉기 위해 온몸을 비틀어야만 한다. 말은 자주 끊어지고 빈칸이 많았다. 비장애인 학생들이 한 학기를 ‘버틸지’ 걱정이었다. 선생들과 행정담당자의 동의를 얻을 자신이 없었다. 모두 난처해지지 않을까. ‘지금도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는데도 나는 몇 사람에게 얘기를 꺼냈다가 결국 강의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다. 장애인에 적대적인 세계에 안주하며 사는 자의 실상이다.
‘망명과 자긍심’의 저자 일라이 클레어에 따르면 ‘제대로 된 세계’는 이렇다. ‘책과 잡지에 점자와 음성 녹음판이 있는 게 당연하고, 청인(비청각장애인)이 수화를 쓰는 게 당연한 세계, 모든 학교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통합교육이 이루어지고, 보건 의료가 무료로 누구에게나 보장되는 세계, 보편적 접근이란 말이 정확하게 그 말뜻 그대로인 세계, 장애인이 집이나 장애인 수용 시설에 감금되지 않고, 보호 작업장(장애인의 취업 기회 보장을 위해 마련한 별도의 시설)으로 밀려나지 않고, 저임금에 노동 착취를 당하지 않는 세계.’
‘귀머거리, 소경, 벙어리, 난쟁이, 꼽추, 절뚝발이, 앉은뱅이, 병신, 불구자’와 같은 차별하고 비하하는 말을 안 쓴다고 세상은 나아지지 않는다. 도리어 그 말을 재사용함으로써 정상과 비정상의 선을 지워버릴 수 있다. ‘나는 불구자다’라고 소리를 질러 비장애인들을 움찔하게 만드는 게 나을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누구도 타인에게 기대지 않는 삶이란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불구이다. 그 눈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과 권리가 의논되어야 한다. 말보다 정치.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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