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자유세계질서의 겨울, '비핵화' 꿈도 잠시 접어 둘까요
"신냉전시대 남북 위기 돌파구 찾기 어려워
'도보다리 추억'도 이미 시효 지났다 봐야
도덕적 접근 대신 차분한 현상유지책 찾아야"
"공산권 붕괴 이후 30여 년에 걸친 자유세계질서의 여름은 가고 이제 본격적인 겨울철입니다. 이런 신냉전 시대에 우리 또한 '비핵화' '통일' 대신 '현상유지' 혹은 '군비통제' 같은 말에 대해 심각히 고민해야 합니다."
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호암관 연구실에서 만난 차태서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현실 진단이다. 국제정치 연구자인 차 교수는 '30년의 위기'(성균관대출판부 발행)란 책을 냈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역사가 E.H. 카(1892~1982)가 쓴 '20년의 위기'에 빗댄 책이다.
20년의 위기는 1919년부터 1939년까지 1, 2차 세계대전 사이 기간을 말한다. 카는 이 책에서 체코의 수데테란트를 독일에 떼 준 뮌헨협정을 열렬히 지지했다. 결과는 2차 대전이었다. 카는 나중에 책을 다시 펴내면서 뮌헨협정에 대한 지지 부분을 덜어내야 했다.
'신냉전'의 도래 ... 전간기 20년 위기와 닮았다
차 교수가 쓴 30년의 위기란 표현은 이에 빗댄 것이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3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러시아가 재부상했다. 우크라이나는 '21세기의 수데테란트'가 됐다. 질문은 꼬리를 문다. 대만 또한 그렇게 될까. 미국은 네빌 체임벌린 같은 선택을 할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아돌프 히틀러일까 아닐까. 이는 한국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칠 문제다. 서울대 외교학과,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을 거친 차 교수는 한국국방연구원, 공군사관학교 등에서 일했다.
-올 연말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거론된다.
"2016년 대선 때 트럼프 낙선을 예측한 전 세계 정치학자들이 모두 망신당하지 않았나.(웃음) 눈여겨봐야 할 사실은 트럼프식 고립주의 외교가 이미 공화당의 주류라는 점, 그리고 트럼프식 고립주의를 안 하겠다며 '아메리카 이즈 백(America is back)'을 외쳤던 조 바이든 대통령 또한 말만 그렇게 했을 뿐 별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영향력이 그만큼 현격하게 줄었고 되돌리기도 쉽지 않다는 얘기다."
-문재인 정부 시절 북미 정상회담 기억 때문인지 남북문제는 트럼프가 더 낫다는 의견도 있다.
"2018년 싱가포르, 다음 해 베트남 하노이에서 두 번에 걸친 북미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그 회담을 '남자 대 남자' '지도자 대 지도자' 회담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북한을 비정상적이고 부도덕한 국가로 간주하면서 북한과의 관계를 선과 악의 대립구도로 보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 면에서는 트럼프가 낫다. 하지만 나쁜 시나리오도 가능하다."
화끈한 트럼프가 차라리 낫다? ... 나쁜 시나리오 가능성도
-나쁜 시나리오라면 어떤 게 있나.
"우리 입장에서는 (미국과 북한이) 비핵화 없이 군비축소에 합의하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의 대륙간탄도탄(ICBM) 개발, 핵무기 양산을 막는 대신 제재 완화를 내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지난 30여 년간의 호시절 동안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비핵화 + 통일'이란 목표가 물거품이 된다."
-그게 진짜 가능할까.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통령 시절 트럼프 주변엔 말리는 참모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사이가 틀어져 모두 떠나버렸다. 재집권하면 트럼프를 말릴 사람이 있을까. 거기다 바이든 정부 아래에서도 미국 학계에선 이제 비핵화가 아니라 군비통제 쪽으로 (대북 정책의)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뭐 하나 좋을 건 없지만 전쟁 안 나는 것만 해도 다행이란 수준으로 가는 것인가.
"그런 구도가 짜이면 우리도 당연히 핵우산 강화, 한미일 협력 강화 등 상응하는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긴장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강조하고 싶은 건, 그럼에도 대화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 대 강으로만 부딪히면 1961년 쿠바 미사일 위기 같은 게 한반도에서 안 일어난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도보다리의 추억'도 신냉전의 겨울 앞에서 무력
-우리 국민이 받아들일까. 기껏 잘해줘 봐야 북한이 핵만 만들었다고 지금도 그러는데.
"그게 제일 큰 문제다. 지금 한국 상황에서 비핵화 안 될 것 같다, 통일도 안 될 것 같다, 당분간은 2개의 코리아가 싸우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자, 그게 신냉전이란 긴 겨울을 지낼 수 있는 방법이다,라고 툭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정치인은 없을 것 같다. 다만 공개적으로 말하진 못한다 해도 실제적인 국가전략적 차원에서는 고려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트럼프 정부든 바이든 정부든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건가.
"자유세계질서의 여름이 지나고 신냉전의 긴 겨울을 대비해야 한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 하는 얘기다. 진보 쪽에서는 문재인-김정은이 직접 대화했던 '도보다리의 추억'을 얘기한다. 윤석열 정부만 아니면 잘 풀렸을 거라 주장한다. 잘못된 얘기라 본다. 지금 북한은 완전히 새로운 결단을 내린 걸로 보인다. 핵무기에다 러시아, 중국까지 있으니 굳이 굽힐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쉽지 않다. 다만 이념에 기반한 접근은 경계해야 한다. 나는 자유민주주의 세력 너는 공산전체주의 세력, 나는 선의 편 너는 악의 편,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결론은 악의 제거뿐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그건 전면전이라는 공멸의 길로 간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 한스 모겐소의 표현대로 지금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최대치는 불만족스럽더라도 일단 만족할 수 있는 선을 찾는 것이다."
조태성 선임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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