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가치 일깨운 코로나19의 역설
“과학과 인문학을 연결시켜라!”
- 스티브 잡스(1955~2011)-
스티브 잡스는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날 정도로 독선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기울어가던 애플로 복귀해 재도약의 발판을 만든 경영의 달인이자, 스마트폰을 대중화시킨 혁신의 아이콘으로 평가 받는다. 자본주의 화신에 가까운 그의 성공 비결은 과학과 인문학의 연결이었다. 전통적으로 기술 기업이 제품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용량이나 속도 등의 스펙이었다. 자기들의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하지만 잡스는 기존 방향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왜’ 애플의 제품을 구매해야 하는지를 설득하였다. 광고에는 스펙이 아닌 사용하는 사람의 모습이 등장하였다. 하이테크 기업이 기술이 아닌 사람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빠른 속도, 큰 용량 등의 숫자에 반응하는 것은 이성과 논리의 영역이다. 하지만 물건을 사는 행위는 감정의 영역이다. 감정의 영역은 ‘무엇을’, ‘어떻게’ 등이 아닌 ‘왜’라는 의문에 강력하게 반응한다. 왜 사야 하는지 설득이 되면 이성적 필요성을 뛰어넘는 강력한 구매 동기가 발생되는데, 이는 과학이 아닌 인문학의 영역이라는 것을 잡스가 꿰뚫어 본 것이다.
이 비결을 따라 하기 위해 많은 기업이 인문학 강좌를 열고 인문학 소양을 강조했지만 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과학과 인문학의 연결은 따로 배워서 될 일이 아니고 생각의 과정을 바꿔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잡스의 전략은 팬데믹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팬데믹 초기에 코로나19에 대한 과학 기술적 대응은 유례없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2019년 12월12일 원인 불명의 호흡기 감염환자 대량 발생이 확인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27일 만에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전체 유전자 서열 정보가 공개된다. 동시에 PCR을 이용한 코로나 검사가 가능해졌다. 예방접종의 경우는 97일 만에 코로나19에 대한 mRNA 백신의 임상실험이 시작되고, 1년 만에 일반 접종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수치만 놓고 보면 과학적으로 얼마나 유례가 없는 빠른 속도였는지 감이 오지 않을 것이다.
현대 분자생물학의 중심에 자리 잡은 PCR이 발명된 것은 불과 50년 전이고, 이를 이용한 바이러스 검사는 21세기에 들어와서야 보편화되었다. 이전에는 소량의 시료에서 ‘빠르고, 민감하고, 정확하고, 저렴하게’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모두 만족하면서, 바이러스 유전자를 확인할 수 있는 검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 바이러스도 서열 정보만 알면 침 한 방울에서도 그 유전자의 존재를 즉시 확인 가능하다. 그 덕분에 원인 불명의 감염자 발생 한 달 만에 코로나19 진단이 가능해진 것이다.
신종 바이러스의 방역에서 정확한 진단법의 부재는 치명적이다. 만약 PCR이 없었다면 코로나19의 확인과 진단법 개발에만 최소 반년 이상이 걸렸을 것이다. 백신의 경우도 개발을 시작하고 일 년이 지나기 전에 접종이 가능해진 것은 생체 mRNA 발현이라는 분자생물학 기법 덕분이다. 만약 이 기술이 없었다면 팬데믹이 끝날 때까지도 효과적 백신 개발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 백신은 mRNA 발현 기술을 이용한 최초의 상용 제품이기도 하다. 팬데믹이라는 특수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빨리 임상시험이 진행되기 어려운 신기술이다. 이에 대한 불신감에 정책에 대한 반발까지 겹쳐져 사회적 격론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최종 결과를 분석해 보면 팬데믹 기간 동안 사망률을 낮추는데 큰 기여를 한 기술임은 명확하다. 이런 평가로 mRNA 발현 기법은 2023년에 노벨상이 수여되었다.
선진국의 방역 성적표가 낮았던 이유
이와 같은 현대 과학 기술의 발전은 서구 문명이 견인해 왔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팬데믹의 국가별 방역 성적표를 들여다보면 서구 선진국들이 나란히 중하위권에 포진해 있다. 전염병을 후진국의 병으로 치부하던 과학 선진국의 자만심을 코로나19가 완전히 뭉개버린 것이다.
방역 성적이 좋지 않은 국가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바이러스 전파의 허브가 되는 국제공항을 가진 대도시가 발달되어 있다. 돌발 상황에 신속한 대처가 어려운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다. 개인주의가 강해 방역을 위한 개인정보 추적이나 이동 통제가 어렵다. 인포데믹의 매개체가 되는 정보 통신이 발달되어 있다. 이 공통점들은 자연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과학 기술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바이러스는 과학의 영역이지만 방역은 사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해결책이 있어도 제대로 적용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이번 팬데믹은 대량의 PCR 검사로 바이러스의 전파 경로가 자세히 추적된 최초의 팬데믹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과학이 발전해서 과학이 풀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가 드러나기도 하였다. 현대 사회에서는 법과 제도를 통해 집단 안전과 개인 자유의 균형을 유지한다. 우리나라에는 감염 예방법에 대상 병원체, 방역 절차, 처벌 규정 등이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신종 바이러스가 창궐하면 법의 예외가 발생한다. 이번 팬데믹처럼 6개월 간격으로 변이가 등장하면 어제까지 통했던 방역 원칙이 오늘은 통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된다. 동일한 행동에 대해 어제까지는 불법이고, 오늘은 합법이 되는 구조적 혼란이 발생하는 것이다. 법이나 규칙은 과거의 결과를 바탕으로 정비가 되는데, 신종 바이러스란 과거의 결과가 없다는 의미다.
현대 국가를 지탱하는 정교한 의사 결정 시스템도 세계화 시대의 바이러스를 막기엔 너무 굼떴다. 현대 과학은 세부적으로 전문화되어 왔다. 따라서 전문성이 필요한 정책을 운용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모두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전문 분야의 경우 자문을 통해 정책을 결정한다. 하지만 전문가와 관료는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 과학자들의 언어는 아날로그지만 관료들의 언어는 디지털이다. 과학자들은 수많은 전제 조건을 걸고 ‘10퍼센트 위험’이라 이야기하면, 관료들은 ‘위험 없음’으로 해석한다. 여기에 다수가 참여하는 의사 결정 절차는 급변하는 신종 바이러스의 전파 상황을 따라가기도 벅차다. 평상시에는 신중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 시스템이 선진 국가의 강점이지만, 급격한 상황 변화가 일어나면 신속한 대응에 약점이 노출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집단과 개인 이익의 불균형이 사태 악화
현대 의학이라 하면 줄기세포, 노화방지, 로봇수술, 인공지능 같은 첨단 과학이 떠오른다. 이는 자본 시장의 원리가 지배하는 민간의료 영역이다. 이를 통해 질병 치료의 돌파구가 열리면 의학 기술의 전반적인 발전으로 연결되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국민의 건강을 떠받치기 위해서는 민간의료와 공공의료라는 두 개의 기둥이 필요하다. 민간의료는 개인의 치료가 목적이고, 공공의료는 집단의 건강이 목적이다. 인류의 평균수명이 극적으로 늘어난 것은 두 영역의 균형 있는 발전 덕분이었다. 하지만 첨단 의학에 쏟아진 스포트라이트가 밝아질수록, 공공의료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는 더 짙어져 왔다.
세계적으로 두 의료 영역의 불균형이 커져가던 와중에 이번 팬데믹이 터졌다. 첨단 의료의 선두를 달리던 선진국이 원시적 바이러스에 유린당하는 모습은, 공공 의료의 균형 잡힌 발전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공공의료는 이익 창출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전염병에 대한 방역은 민간 의료에서 감당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평상시에는 수요가 없다가 전염병이 창궐할 때만 수요가 폭증하기 때문이다. 이때 제대로 된 방역을 펼치는 위해서는 평상시에 인력, 장비, 시설 등을 기본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방역 인프라는 돈 먹는 하마 취급을 받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군대가 없는 나라는 없다. 전쟁 위기에 대비한 예방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공 의료 역시 안전을 위한 예방이라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 문제 이전에 서양 선진국의 방역 성적이 낮은 결정적 이유는 방역을 따르지 않고 바이러스를 전파한 시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것은 사람들의 행동이며, 방역의 본질은 집단을 위해 개인에게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격리, 봉쇄, 마스크, 백신 등은 모두 개인의 자유 의지를 억압한다. 개인의 자유가 타인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철저한 방역의 필요성에 동의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번 팬데믹처럼 방역 기간이 길어질수록 사회적 합의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방역은 집단의 단위로 시행되지만 부작용의 크기는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복잡하게 연결된 사회에서 살아간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삶에서는 악당이 될 수 있다. 얽혀있는 연결 고리에서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이익이 남의 손해가 될 수 있고, 나의 손해가 타인에게 이익이 될 수도 있다. 집단에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방역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겐 가벼운 불편에 그치지만, 누군가에겐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가 된다.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것이 배고픔이다. 당장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타인을 위한 희생을 강요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개인 사정을 일일이 고려하면 바이러스는 그 틈새로 퍼져 나간다. 이렇게 팬데믹은 집단과 개인의 균형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드러내었다.
인문학이 빠진 과학은 위험
제우스에게 반항한 죄로 산꼭대기로 굴러 떨어지는 돌을 끝없이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 시시포스의 고통은 누구나 깊게 공감한다. 사람의 두뇌는 합리화되지 않는 행동에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과학적 진위 여부와 별개로 개인이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방역 지침이 지속되면 거부감이 누적된다. 실제 데이터 분석을 해보면 방역 성적에는 대중 캠페인과 투명한 정보 공개가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통신망이 발달한 선진국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다양한 수준의 정보가 흘러넘친다. 정보의 판단이 개인에게 달려 있는 상황에서는 합리적이고 어려운 설명보다, 자극적이고 쉬운 음모론이나 반지성주의를 선택하기 쉽다. 자신의 거부감을 쉽게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역에 대한 거부감이 행동으로 발현하는 사람이 일부라도 바이러스는 그 틈으로 새어나간다. 결국 방역 기간을 더 연장시켜 모든 사람이 같이 힘들어진다. 바이러스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방역 체계가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에 대한 이해와 설득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팬데믹에 대한 방역도 인류의 공동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다. 원시적인 코로나19가 첨단 문명에게 역설한 것은 신뢰와 협력의 중요성이다. 인간의 사정이 개입하는 것을 경계하는 과학과, 인간의 사정을 고려하는 인문학은 연결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왜(why)와 어떻게(how)를 구분하면 연결점이 보인다. 왜 과학을 하는가? 어떻게 과학을 하는가? 그리고 왜 인문학을 하는가? 어떻게 인문학을 하는가? 이 질문을 잘 구분해야 과학과 인문학의 적절한 융합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학과 인문학의 균형 있는 발전이다. 흰 공과 검은 공을 섞는다고 회색 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회색 공을 만들려면 재료 단계에서 흰 색과 검은 색을 섞어야 한다. 과학이 빠진 인문학은 공허하고 인문학이 빠진 과학은 위험하다. 우리가 겪은 팬데믹의 부작용은 과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문학이 부족해서 발생한 것이다. 지금까지 자본의 논리에 맞지 않는 인문학은 외면을 당해 왔다. 하지만 우리라는 공감과 이념 상실의 대가로 치르는 기회비용은 팬데믹이 끝난 지금까지 파악조차 안 되고 있다. 세계화, 정보화라는 변화된 환경에서는 인문학의 부활이 절실하다.
주철현 | 울산의대 미생물학·의학교육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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