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대금 달라" 정부 나서도 '나 몰라라'…소송 덫에 빠진 한국 기업들
[편집자주] 해외 건설 수주액이 4년째 300억달러를 넘어섰다. 올해 목표는 400억달러다. 건설사들은 국내 부동산시장 침체가 길어지자 해외시장에서 활로를 찾고 있다. 정부도 '원팀코리아'로 수주 지원에 나섰다. 반면 해외 사업이 늘어난 만큼 '부실 수주' 위험도 커졌다. '황금향'을 쫓는 건설사들의 해외 사업 현주소를 짚어본다.
정부가 수년째 베트남에서 공사대금을 받지 못한 롯데건설과 포스코이앤씨를 대신해 현지 정부에 수차례 협조 요청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베트남 정부는 3개월 넘게 서류 검토 중이라는 입장이다. 한국-베트남 기업 간 거래에 베트남 정부가 간접적으로 개입하는 형국이어서 '외교문제 비화' 가능성도 제기된다.
13일 외교부와 건설업계 등에 따르면 주베트남한국대사관과 외교부 본부는 지난해 12월부터 베트남 외교부와 교통부 등에 '국내 기업 활동에 협조해달라'는 취지의 공한(公翰·공적 서류)을 수차례 발송했다. 롯데·포스코와 베트남고속도로공사(VEC) 분쟁에 국제상공회의소(ICC)가 우리 측에 공사대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데 따른 협조 요청이다.
ICC는 싱가포르에 위치해 관련 판결문에 대한 주싱가포르베트남대사관의 영사 인증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 '국제 판결문에 문제가 없다'고 공증해야 베트남 현지에서 공사대금 지급절차가 시작될 수 있다. 하지만 영사 인증은 3개월 이상 이뤄지지 않고 있고, 이에 따른 우리 정부 문제제기와 협조 요청도 묵살되고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우리 기업이 지난해 12월 외교적 지원을 요청함에 따라 베트남 외교부 등 관계부처에 문제를 제기하고 협조를 요청하는 공한을 발송했다"면서 "베트남 측에선 공한을 잘 받았고 관련 서류를 검토하고 있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주베트남한국대사관 등이 롯데·포스코와 관련 상황을 긴밀히 공유하고 있으며 베트남 정부에 추가 공한 송부, 관계자 면담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기업 애로사항 해소를 위해 노력 중"이라며 "'한국-베트남 국세관세 대화' 등 간담회를 개최해 베트남 정부에 우리 기업 애로사항을 전달하고 각종 제도 개선을 요청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 문제해결에 총력을 다하고 있지만 사태 진전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특히 베트남 정부가 양국 기업 간 거래에 영사 인증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는 등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어 외교문제로 커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 관계자는 "현 정부가 해외시장에 진출한 우리 기업에 대한 재외공관 지원 확대를 공언했고 경제외교를 강조하고 있다"며 "이번 사태에 대해선 외교당국 고위급 차원에서 베트남 정부에 강한 유감 표명과 국내기업 활동 보장을 위한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했다.
건설현장은 '지붕 없는 공장'이라고도 불린다. 통제된 환경에서 생산하는 제조업 공장과 달리 돌발상황에 대응하면서 공사해야 하는 건설업 특징을 표현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동남아시아 등 해외로 눈을 돌린 건설사들에게 이러한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한 리스크 관리는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하지만 부실한 시장조사, 미숙한 계약관리, 소극적인 클레임 통지 등으로 분쟁이 발생하는 사례가 지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해외건설 분야를 전문으로 맡아온 로펌 변호사들이 강조하는 체크포인트를 정리해봤다.
◆ 서두르면 스텝 꼬인다…기록 관리가 핵심
유럽 건설사들은 해외시장에 처음 진출할 때 가장 먼저 현지 시장여건을 조사할 사무소를 개설한다. 수주활동 없이 해당 시장관행, 공사수행 환경, 건설법령 등을 조사하는 데 1~2년을 쏟는다. 조사 이후 '충분한 경쟁력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프로젝트에 뛰어든다.
국내 건설사들은 출장을 나가 입찰이 이뤄지면 그때야 지사 사무소를 만든다고 한다. 입찰 단계부터 계약서를 꼼꼼히 검토하고 리스크를 줄이려는 노력이 부족해 이후 발생하는 분쟁에서도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김효원 법무법인 율촌 고문은 "국내 건설사들은 일반적으로 낙찰 이후에야 면밀하게 계약서를 검토하기 때문에 리스크를 고스란히 끌어안는다"며 "선진 업체들일수록 입찰 초기 또는 사업추진 초기 단계에 리스크 관리에 주안점을 둔다"고 말했다.
계약 관리 측면에서도 국내 건설사들이 발주자나 하도사에 대해 클레임 통지를 하는 것을 꺼려 문제가 생기는 일도 많다. 클레임 제기 기한을 넘겨 정당한 비용을 청구하지 못하거나, 당시 사정을 입증할 자료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아 클레임 입증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한상훈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국내 기업들은 발주자와 항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고, 분쟁을 염두에 둔 클레임 제기 등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며 "또 발주자 귀책으로 지연, 비용 등이 발생한 경우 즉각 통지하거나 기록하지 않아도 상호 신뢰로써 원만하게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건설계약 분쟁은 당사자 간 상당 기간 협의를 거친 후 분쟁으로 발전하는데, 이때 관련 기록 생성단계부터 향후 분쟁에 대비해 내용과 문구를 고려해야 한다. 이를 등한시하다 분쟁 단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익명을 요구한 대형로펌 관계자는 "건설사가 일일 또는 주간 공정보고서에 자신에게 책임 있는 사유로 인한 지연에 대해서만 중요하게 다루고, 발주사에 책임 있는 공사 지연에 대해서는 중요하지 않게 언급하는 경우 나중에 분쟁에서 지연에 대한 책임을 판단할 때 건설사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 국제중재도, 집행도…쉬운 게 없다
영미법을 주로 참고하는 국제중재에선 중재인의 재량 범위가 넓지 않아 구체적인 증거물을 최대한 제출해야 한다. 또 전문감정인을 쓰고, 모든 서류를 영어로 번역해야 하기 때문에 국내 소송보다 비용도 수배가 넘게 든다. 반면 대륙법계인 한국은 판사 재량이 상대적으로 커 근거자료를 꼼꼼히 작성하지 않아도 법원이 클레임을 인정해주다 보니 계약서를 아주 복잡하게 쓸 필요가 없었다.
게임규칙이 다른 해외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이 분쟁을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환경인 것이다.
임병우 김앤장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외국은 추가공사 비용이나 지연에 대한 서류를 아주 꼼꼼히 작성하고, 소송이나 중재를 하기 전 상대측에 클레임할 때도 전문가들을 쓴다"며 "계약서 작성, 근거서류 마련, 감정인을 쓰는 등 한국 경험에서 별로 필요가 없어 (해외시장에서) 이게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정확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운좋게 중재에 이겨도 중재판결문이 사회질서에 위반될 경우 집행이 거부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슬람 율법에 위반되는 도박, 법정이자 등이 판결문에 포함되면 이에 대한 집행을 거절할 수 있는 사유가 된다. 국내에서도 우리법이 용인하지 않는 징벌적 손해배상금이 판결문에 포함돼 집행이 거절된 경우도 있다.
이조섭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는 "중동에서 진행되는 건설프로젝트에서 국내건설사가 스페인에 본사를 둔 회사와 분쟁이 발생하면, 중재판정을 집행하기 위해 중동이 아닌 스페인에서 집행절차를 진행해야 할 수 있다"며 "분쟁이 발생할 경우 국제중재절차 뿐 아니라 중재판결이 나온 후 진행되는 집행절차에 관해 미리 연구해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인한 기자 science.inhan@mt.co.kr 김평화 기자 peace@mt.co.kr 조준영 기자 ch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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