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사각지대’ 트랜스젠더의 한마디, ‘젠더클리닉’ 씨앗이 됐다

채윤태 기자 2024. 3. 1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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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여성들 ④ 황나현 고대 안암병원 젠더클리닉 교수
고려대 안암병원 젠더클리닉 황나현 교수가 지난 1월29일 오후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한국 의료 수준은 아시아 ‘톱’ 수준인데, 성확정(성별확정) 수술을 받을 곳이 없어 외국으로 가야하는 현실이 이해되지 않았어요.”

2021년 1월, 고려대 안암병원에 전국 최초이자 상급 종합병원 유일의 성소수자 전문 클리닉인 ‘젠더클리닉’이 문을 열었다. 국내에선 성확정 수술을 받을 곳이 마땅치 않아 트랜스젠더·인터섹스 환자들이 태국(타이)까지 원정 가는 현실은 바꿔야지 않겠느냐는 황나현 교수(성형외과)의 10년여 간의 외침이 와닿은 결과다. 이곳에선 성확정 수술이나 호르몬 치료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차별’의 시선이 두려워 병원 문턱도 쉽사리 넘지 못하는 성소수자 환자들을 위한 의료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병원 직원들의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 지난해 1월부터 성소수자 당사자와 전문가를 초빙해 매달 ‘차별 없는 병원’ 연속 강좌를 하고 있다. 지난 1월 말, 차별 없는 의료 최전선에 서 있는 황 교수를 만나 젠더클리닉 탄생과 역할 등에 들어봤다.

—성소수자 의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우연한 계기였다. 의대생일 때 잡지사 에디터인 친구의 취재에 따라갔다가 트랜스젠더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얘기하다보니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내가 의대생이란 이야기를 듣고 ‘성소수자를 위한 의료에 힘써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트랜스젠더들은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있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 힘들다며, 성확정수술을 받기 위해 대부분 태국에 가는 상황이란 얘기들을 들려줬다. 인턴 기간 동안에도 그들의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사각지대라니.’ 우리나라 의료는 아시아 톱 수준인데, 한국에서 치료, 진료를 받을 곳이 없어서 해외로 나간다는 게 어린 마음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성확정 수술을 받고자하는 성소수자들이 왜 태국으로 떠나는지.

“10여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젠더클리닉이라는 간판을 걸고 진료하는 데가 없었다. 국내에서 성확정 수술은 건강보험 적용도 안 되는데, 태국은 성확정 수술 경험이 많을 뿐만 아니라, 비용도 저렴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확정 수술은 어떻게 공부했는지.

“의대생, 인턴 때부터 제대로 체계적으로 배워서 잘 하고 싶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성확정 수술 관련 커리큘럼이 잘 안 돼 있어 배울 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2013년 벨기에 겐트대학교의 스텐 몬스트리 교수님께 직접 연락을 드렸다. ‘한국에서 (성확정 수술을) 배우겠다고 연락온 게 처음이다. 반갑다. 얼마든지 와서 배워라’라는 답을 받았다. 2013년 벨기에로 가서 성확정 수술 전후 체계 및 팀을 꾸리는 방법 등을 배웠다. 그때의 경험이 2021년 젠더클리닉을 열 때 도움이 많이 됐다. 2022년 5월에는 태국의 사응우안 쿠나폰 박사에게 성확정 수술을 배웠는데, ‘이제 한국 환자들이 태국으로 오지 않아도 되겠다. 한국 환자들은 너한테 수술받으면 좋겠다. 그게 좋겠다’고 하셨다.”

—젠더클리닉을 열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들려달라.

“젠더클리닉 개소는 쭉 바람뿐이었다. 선배, 교수님들에게 얘기하면 ‘그래 필요는 하지’라며 필요성에 대해 동의는 하시면서도 ‘그런데 경영진이 할까? 안 해줄걸’이라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10년을 어필하다가 거의 포기 상태까지 갔는데 경영진, 병원장님이 ‘시대정신에 맞게 열어야 한다. 남들이 안하는 것을 끌어 안고 나서자’고 했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2021년 젠더클리닉을 열게 됐다.”

고대안암병원 젠더클리닉.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우리나라 성소수자 의료에 개선해야할 점이 있다면.

“일단 보건 통계에 성소수자가 잡히지 않는다. 국민건강영양조사 등에서도 성 정체성, 성적 지향 등은 잡히지 않는다. 대부분의 통계에서 남성과 여성 두 가지 성 가운데 하나에만 체크하게 돼 있다. 주요 선진국 중에 남·여 두개로만 나눠서 통계를 내는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다. 그래서 성소수자들의 의료 이용률이 어떤지, 어떤 진단이 내려지는지 하나도 통계로 나오지 않는다. 젠더클리닉에서 사업 계획을 짜고 정책을 만들 때도 기초적인 통계가 있어야 논거로 삼는데 통계가 하나도 없다.

최근에 국내에서도 호르몬 치료나 성확정 수술을 받는 분들의 건강과 심리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 ‘한국 트랜스젠더·성별 다양성이 있는 사람 코호트 구축 및 건강 추적관찰 연구’로, 성소수자의 건강과 성확정 치료에 따른 건강상태 변화를 확인하는 추적관찰 연구다. 고대 안암병원 젠더클리닉를 비롯해 강동성심병원 엘지비티큐플러스(LGBTQ+)센터, 국립의료원 산부인과,살림의원, 색다른의원 등이 참여하고 있고 앞으로 참여 기관들이 더 많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성확정 수술, 호르몬 치료 등 트랜지션 외 젠더클리닉에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

꼭 수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분들도 있다.가슴이나 특정 부위만 수술하거나 수술 없이 호르몬 치료만 하거나, 그냥 생활하시는 분도 있다. 꼭 트랜지션을 원하지 않더라도, 다른 상담이 필요한 분이면 그냥 다 오셔도 된다. 성소수자들 가운에는 색안경끼고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코로나19에 걸려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만 있던 분들도 있었다. 그런 분들께 ‘왜 그러셨어요’ 물어보면 병원가는 게 너무 두려웠다고 하신다. 주민등록번호에는 남성으로 표기돼 있는데 외모는 여성이라 시선과 눈빛이 상처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젠더클리닉에서는 병원 직원들을 대상으로 지난해 1월부터 성소수자 당사자와 전문가를 초빙해 매달 ‘차별 없는 병원’ 연속 강좌를 하고 있다. 또 성소수자를 위해 디테일한 배려들을 고민한다.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들은 불리고 싶은 이름과 실제 이름이 다른 경우가 있다. 남자 이름인데 여성으로 보인다면 계속 쳐다보거나 되묻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젠더클리닉에선 불리고 싶은 이름으로 호명한다. 또 병실에 성별을 표기하지 않기도 하다. 모든 환자는 똑같이, 차별 없이 진료하는 게 포인트다.”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다면.

“그동안 성확정 수술을 못하고 사시다가 60∼70대가 되신 분들도 있다. 이제껏 제대로 못 산 것 같은 아쉬움이 든다며, 지금이라도 수술하고 싶다고 하신다. ‘지금 그 나이에 수술해서 뭐하냐’고 묻는 분이 계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분들의 답은 ‘태어날 땐 남자(여자)로 태어났지만, 죽을 때라도 여자(남자)로 죽고 싶다’는 것이다. 죽을 때나마 여자(남자)로 기억되고 싶다는 것이다.

요즘은 반갑게도 당사자와 부모님이 같이 젠더클리닉을 찾는 경우도 꽤 많다. 그렇지만 엄마한테 말하지 못하고 수술 뒤에 용서를 구한 경우도 있었다. ‘엄마랑 나랑 살 길은 허락을 구하는 것보다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다. 허락해줄 때까지 기다리다간 죽었을 것이다. (말 없이 수술한 건) 살기 위해서였다’고 하더다. 수술 끝나자마자, 환자가 기뻐하고 눈물을 흘리며 ‘다시 태어난 것 같다. 생명의 은인이다’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보람되는 일이다.”

—젠더클리닉을 이끄는 입장에서 바라는 점이 있다면.

“보수적인 통계에서도 전체 인구의 7∼8%는 성소수자라고 한다. 각종 차별적인 언행과 시선 때문에 성소수자들은 병원 로비 카운터에서부터, 화장실, 성형외과 외래까지 오는 동안에도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성소수자들이 아파서 병원에 왔을 때 젠더클리닉을 거치지 않더라도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 젠더클리닉이 생긴 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편안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지만, 아직 더 많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도 노력하고 있고 하루 이틀에 바꾸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후배 의사들, 의료진, 행정직 등 모든 분야에서 성소수자 의료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용어 설명>

·인터섹스: 우리말로는 간성. 생식기나 성호르몬과 같은 신체적 특징이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조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

·성확정 수술: 기존에는 태어날 때 부여된 성별을 바꾼다는 의미로 ‘성전환 수술’이란 표현을 사용했으나, 최근에는 트랜스젠더 등이 주도적으로 스스로 느끼는 정체성에 맞게 성을 지정한다는 의미를 담아 이런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한다.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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