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비 도피’ 이종섭, 대통령의 무리수

김원철 기자 2024. 3. 1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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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9월 인천항 수로 및 팔미도 근해 노적봉함에서 열린 제73주년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식에서 이종섭 국방부 장관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원철 | 사회부장

형사 서도철은 조태오가 의심스럽습니다. 심각한 일에 연루됐을 거라는 정황이 자꾸 튀어나옵니다. 하지만 재벌 3세의 힘은 막강합니다. 수사망을 좁혀가도 이리저리 피해 나가기만 합니다. 하지만 사실 조태오도 서도철이 두렵습니다. 두려움은 무리수로 이어집니다. 조태오 쪽은 사람을 보내 서도철 살해를 시도합니다. 그러다 실수로 그의 동료 경찰관을 흉기로 찌르고 맙니다. 서도철의 상사는 눈이 뒤집힙니다. “어디서 대한민국 경찰을 건드려? 사주한 새끼 내 앞에 데려와!” 그 말을 들은 서도철이 씩 웃으며 관객을 향해 읊조립니다.

“들었지? 형사 살인교사로 판 뒤집혔다.”

2024년 대한민국은 영화 ‘베테랑’의 현실판입니다. 국비 유학도 아닌 초유의 ‘국비 도피’는 ‘채아무개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을 ‘대통령의 범인 도피’ 의혹으로 갈아치웠습니다. 대통령이 국방부의 일 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호통’을 쳤는지, 쳤다면 그것이 부당한 외압으로 이어졌는지를 따지던 사건은, 대통령이 자신과 공범 혐의를 받던 피의자를 국외 도피시킨 사건으로 전환됐습니다. 장막 뒤에 숨어 가닿기 힘들었던 ‘조태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며 스스로 최전선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전선은 명확해졌습니다. 대통령이 주인공입니다. 대통령이 주인공인 사건에 우리는 익숙합니다. 10년 새 2명의 전직 대통령을 감옥 보낸 나라니까요. 관전을 위해 복습은 필수입니다. 자료는 많습니다.

헌정사상 첫 대통령 탄핵의 서막을 열었던 사건, ‘나쁜 사람’이 바이블입니다. 2013년 8월 박근혜 대통령이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을 청와대 집무실로 부릅니다. 수첩을 꺼냅니다. 문체부 노아무개 국장과 진아무개 과장의 이름을 거명합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 문제의 바로 그 ‘누군가’에게서 들은 말을 근거로 주무 장관에게 소속 부처 국·과장 경질 인사를 지시한 것입니다. 다음달 문화체육관광부 체육국장과 체육정책과장은 경질됩니다.

외견상 대통령이 인사권을 행사한 이 사안을 검사 윤석열이 포함된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범죄로 판단했습니다. 직권남용 및 강요 혐의를 적용했습니다. 1·2심 법원은 직권남용과 함께 강요죄까지 유죄로 인정했습니다. 대통령은 공무원 사회에서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그의 입에서 나온 요구는 따르지 않을 시 부당한 인사발령 등 구체적 불이익을 수반한다는 겁니다. 강요죄의 구성요건 중 하나가 협박인데, 대통령의 지시는 그 자체로 ‘따르지 않으면 엄청난 불이익이 온다’는 ‘해악의 고지’에 해당해 협박으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후 대법원 다수의견은 “구체적인 해악 고지가 없었다”며 강요죄를 무죄로 봤지만 직권남용죄는 끝까지 인정됐습니다. 대통령의 인사권에도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호주 대사로 임명돼 지난 10일 인천공항에서 출국하는 과정에서 문화방송(MBC) 기자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다. 문화방송 뉴스 유튜브 갈무리

12일 더불어민주당은 이종섭 대사의 ‘도피성 출국’ 과정에서의 불법 의혹을 수사할 특별검사 임명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이 대사 출국 과정에서의 불법행위, 이와 관련한 대통령실·외교부·법무부·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등의 직무유기 및 직권남용 관련 불법행위가 수사 대상입니다.

이 전 장관을 호주(오스트레일리아) 대사로 임명하는 과정은 그간의 외교 관례와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법무부가 이 대사의 출국금지를 해제해준 과정도 그간의 수사 관례와 상식을 뛰어넘습니다. 초상식적인 결정과 판단이 버무려진 이 대사의 ‘임명과 출국’ 모든 과정엔 직권남용 및 강요 혐의를 받을 만한 발언과 지시·보고가 범벅돼 있을 것입니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 범죄 전문가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그만큼 현직 대통령의 범죄에 정통한 이는 없습니다. 대통령의 어떤 지시가, 어떤 식으로 전달돼, 어떤 결과를 낳았을 때, 어떤 범죄 혐의가 적용될 수 있는지 본능처럼 그의 온몸에 새겨져 있습니다. ‘전 국방부 장관 이종섭을 호주 대사로 보내라.’ 전문가인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지시를 내렸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만큼 징후적입니다.

영화에서 조태오 쪽의 무리수는 의도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조태오의 운명을 끌고 갑니다. “왜 이렇게까지…” 일을 벌여 “판을 뒤집”은 대통령의 무리수는 윤 대통령의 운명을 어디로 끌고 갈까요.

won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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