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선 펄펄 나는데"...미지근한 걸그룹 국내 인기, 위기인가 아닌가
국내선 음반 판매량 감소에 음원 차트에서도 약세
해외 시장 치중하며 국내 팬들 외면...기획사 임원들 고령화로 트렌드 뒤쳐져
"초동 경쟁 자제하고 장기적 관점의 전략과 혁신 필요"
#. 해외: 걸그룹의 눈부신 활약
4세대 걸그룹 대표주자로 불리는 뉴진스와 르세라핌은 13일 일본 레코드협회가 시상하는 ‘일본 골드 디스크 대상’에서 각각 2개씩, 총 4개 부문의 상을 받았다. 뉴진스는 일본 정식 데뷔 전인데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트와이스는 데뷔 9년 만에 미국 빌보드 종합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 1위를 차지했다.
#. 국내: 걸그룹에 드리운 그림자
지난달 발매된 르세라핌의 세 번째 미니앨범(EP)의 초동(발매 직후 일주일간) 판매량은 99만 장으로, 이전 앨범보다 약 20% 감소했다. ‘걸그룹 명가’로 불리는 JYP엔터테인먼트 소속 걸그룹들의 성적은 더 저조하다. 1월 발매된 있지의 여덟 번째 EP 초동 기록은 이전 앨범 대비 61% 줄었고, 엔믹스의 새 앨범 초동 판매량도 이전 앨범 대비 40%가량 감소한 61만 장을 기록했다.
월간 차트 톱10 걸그룹 곡 비중, 1년 만에 65%에서 30%로
K팝 걸그룹 국내 시장이 심상치 않다. 폭발적이었던 음반 판매량 성장세가 꺾였고, 국내 대중적 인기의 지표인 토종 음원 사이트 순위 상위권에서도 비중이 크게 줄었다. 미국 일본 등 해외 시장에선 승승장구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걸그룹의 위기일까, 아니면 급격한 인플레이션 이후의 숨 고르기일까.
걸그룹 위기설의 진원지는 하이브가 급부상하기 전까지 3대 기획사로 불린 SM, YG, JYP엔터테인먼트 걸그룹 부문의 부진이다. SM 소속 에스파는 이수만 전 총괄 프로듀서와 결별 이후 데뷔 때보다 국내의 대중적 관심도가 떨어졌고, 최근 핵심 소비층인 중국 팬덤의 이탈로 부진한 앨범 판매량을 기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멤버 카리나의 연애 인정 이후 팬들의 항의 시위가 이어지고 SM 주가가 하락하는 등 몸살을 앓았다. 에스파의 뒤를 이을 걸그룹도 현재로선 마땅치 않다.
YG는 블랙핑크 멤버들과의 계약 종료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신인 베이비몬스터에 대한 국내 반응은 뜨겁지 않다. 데뷔를 두 달 미룬 끝에 지난해 11월 발표한 첫 싱글과 지난달 내놓은 후속곡은 음원사이트 멜론 일간 차트 100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 JYP도 연초 대비 주가가 30% 가까이 폭락할 정도로 시장 전망이 밝지 않다. 있지와 엔믹스의 새 앨범은 판매량 감소는 물론, 수록곡이 멜론 주간 차트 100위 안에 진입조차 못 하는 저조한 결과를 냈다. 3개 회사를 중심으로 한 실적 부진으로 멜론 월간 차트 톱10에서 걸그룹 곡의 비중은 지난해 상반기 평균 65%에서 최근 6개월 사이 30%로 줄었다.
음반 판매량 급감은 국내 초동 판매량 경쟁이 한풀 꺾인 데다 대 중국 수출량이 줄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실제 지난해 한 걸그룹은 앨범 판매량을 늘리려고 팬사인회를 90여 차례 열 만큼 과열 경쟁 양상을 보였다. 기획사들이 사인회 마케팅을 남발하면서 당첨 확률을 높이기 위해 앨범을 수십~수백 장씩 사던 팬들의 피로도도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 K팝 기획사 관계자는 “팬사인회로 단기간에 음반 판매량이 크게 늘 순 있겠지만 지속가능한 모델은 아니다”라며 “초동 마케팅의 거품이 한계에 이른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걸그룹 메이커'의 고령화..."프로듀서부터 혁신을"
걸그룹 약세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것은 기획사들이 국내보다 수익성이 좋은 해외 시장, 특히 일본 미국 유럽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K팝 그룹들이 앨범 활동 초기엔 국내 팬들과 소통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최근엔 해외 활동에 더 치중하는 그룹들이 늘고 있다. K팝 걸그룹 시장의 ‘큰손’인 중국 팬덤을 비롯해 국내 팬덤이 약해지는 이유다. 김진우 서클차트 수석연구위원은 “영어 가사와 서구권 작곡가의 참여를 늘리는 등 해외 시장을 겨냥한 곡들이 주를 이루고 해외 활동을 늘리면서 국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듯하다”고 말했다.
JYP와 YG가 부진한 이유로는 결정권을 쥔 사내 고위 임원들의 고령화도 꼽힌다. 한 K팝 기획사 임원은 “대중음악은 트렌드를 빨리 읽고 유연하게 변화해야 하는데, 회사가 오래되고 규모가 커지면 변화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며 “하이브가 민희진 대표를 영입해 뉴진스를 성공시켰듯 젊고 재능 있는 프로듀서를 계속 영입해 혁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업계 내부 인사와 전문가들은 대체로 ‘걸그룹의 위기’라고 말하긴 이르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 위원은 “해외 시장에선 꾸준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걸그룹의 위기’라 단정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는 “최근 몇 년 사이 너무 많은 신인 걸그룹이 등장하면서 포화 상태에 이르러 정체 현상을 보이는 것”이라면서도 "사인회를 통한 초동 판매량 경쟁을 자제하고 걸그룹의 교체 주기를 줄이면서 한 그룹이 좀 더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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