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들의 못자리' 학전, 역사 속으로…33년만 끝내 폐관
빠듯한 살림에도 김민기 헌신으로 역사 이어와…재개관은 7월 이후
(서울=연합뉴스) 최주성 기자 = 배울 학(學)에 밭 전(田).
개관 33주년인 오는 15일 폐관하는 대학로 소극장 학전은 지난 33년간 예술인들의 못자리가 되어준 공간이다.
설 자리를 잃은 가수들은 학전에서 관객과 만나며 라이브 콘서트 문화를 꽃피웠다. '학전 독수리 오형제'로 불렸던 배우 김윤석, 황정민을 비롯해 수많은 스타를 배출한 무대였다.
학전이 제작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4천회 넘는 공연으로 소극장 뮤지컬의 역사를 썼고, '고추장 떡볶이' 등 꾸준히 어린이를 위한 작품을 제작했다.
라이브 공연의 성지에서 뮤지컬·어린이극 산실로
학전은 '아침이슬', '상록수' 등을 부른 김민기 대표가 1991년 3월 15일 대학로에 문을 연 공간이다.
'문화예술계 인재들의 못자리'를 만들겠다는 뜻으로 시작한 학전의 역사는 라이브 콘서트로 꽃을 피웠다.
학전 개관 당시는 가요계에 '서태지와 아이들' 열풍이 몰아쳤던 때로 고(故) 김광석을 비롯해 노영심, 안치환, 노래를 찾는 사람들, 동물원 등 설 자리를 잃은 통기타 가수들이 학전에서 관객을 만났다.
김 대표는 '사람의 연주를 실제로 보고 듣는 것이 오리지널리티(독창성)의 기본'이라는 생각으로 음악인과 관객이 소통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고, 라이브 콘서트는 학전의 정체성으로 자리를 잡았다.
학전의 라이브 콘서트는 문화가 되어 대학로 전반으로 퍼져나갔고, 이후 대학로에서 시작된 문화가 홍대 라이브 공연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라이브 연주를 강조한 학전의 정체성은 뮤지컬과 어린이극에서도 이어졌다.
1994년 초연한 '지하철 1호선'은 한국 뮤지컬 최초로 라이브 연주를 선보인 작품이었다. 당시만 해도 뮤지컬은 녹음된 반주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관객들은 라이브 록 연주를 들으려 극장을 찾았다.
거기에 김 대표가 독일 그립스 극단의 원작을 한국 정서에 맞게 직접 번안하면서 작품은 장기 흥행했다. 공연 횟수 4천회, 누적 관객 70만명을 기록하며 소극장 뮤지컬의 역사를 썼다.
학전은 큰 수익이 남지 않는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공연에도 힘썼다.
2004년 '우리는 친구다'를 시작으로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등 매년 꾸준히 어린이 공연을 제작해왔다. 입시경쟁에 지친 아이들은 라이브 음악을 곁들인 공연으로 숨통을 틔웠고, 어른들에게는 아이들도 고민과 소망을 가진 인격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김광석부터 '학전 독수리 오형제'까지…스타 발굴 터전
학전은 대학로의 원석을 발굴해 대한민국 공연계와 가요계를 빛내는 인재로 키워낸 곳이었다.
'학전 독수리 오형제'로 불린 김윤석, 설경구, 장현성, 조승우, 황정민을 필두로 구원영, 방은진, 이정은, 김무열, 최덕문, 안내상 등 수많은 배우가 학전을 거쳐 성장했다.
매 공연 오디션으로 새로운 배우를 선발한 '지하철 1호선'은 스타들의 등용문이었다.
설경구는 학전에서 포스터를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다 '지하철 1호선'에 캐스팅되어 본격적인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재즈 가수로 명성을 얻은 나윤선도 해당 작품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가수 윤도현과 유리상자는 학전에서 첫 공연을 열었고, 영화 '기생충'의 음악감독 정재일 역시 학전의 음악감독을 맡았던 경력이 있다.
특히 학전에서만 1천번 넘게 공연을 열었던 고(故) 김광석은 학전이 낳은 최고 스타였다. 그의 콘서트는 공연장 문을 뜯어 관객을 추가로 받고 자리가 없는 관객은 무대 뒤에서 공연을 관람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학전 출신 예술인들은 더 큰 무대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 학전을 향한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의형제'로 뮤지컬 무대에 데뷔한 조승우는 한 뮤지컬 시상식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21살 나이에 학전에서 무대가 주는 아름다움과 모든 것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며 "배움의 터전이자 집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학전에서 열리는 마지막 콘서트를 기획한 가수 박학기는 "학전은 첫발을 내디딜 수 있는 꿈의 장소였다"며 "김민기라는 사람에게, 학전에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돌아봤다.
김민기 헌신으로 이끌어온 33년…재개관은 7월 이후
학전이 33년간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데는 김 대표의 헌신이 절대적이었다.
김 대표는 학전을 운영하며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렸지만 "오로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으로 묵묵히 못자리 농사를 지었다.
음반 계약금과 저작권료를 모두 쏟아부어 운영할 정도로 빠듯한 살림에도 배우들에게 최저 출연료를 보장했고, 흥행 실적에 따라 보너스를 지급하는 제도로 식구들을 챙겼다.
그는 "죽는 날까지 학전을 운영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히기도 했으나 만성적인 재정난과 위암 진단이 겹치며 지난해 폐관을 결정했다.
14일 예정된 '학전 어게인 콘서트'가 끝나면 학전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공간을 이어받아 운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도 "내가 없으면 학전은 없다"는 김 대표의 뜻을 존중해 학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위원회는 '김광석 노래상 경연대회'와 어린이극 등 학전의 기존 사업은 유지한다는 방침이지만 정식 재개관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위원회 관계자는 "현재 민간 단체를 선정해 공간 운영을 맡기는 방식과 위원회가 직접 운영하는 방식을 놓고 저울질하고 있다"며 "극장을 재정비하는 시간이 3∼4개월가량 정도 필요해 재개관은 7월 이후가 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cj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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