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지 말란 얘기”...정부 예산 줄삭감에 출판·서점계 비명

양선아 기자 2024. 3. 14.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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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제작 지원부터 문화활동 지원까지
정부 예산 사라져 민간 재원으로만 발버둥
지역서점·도서관 등 ‘책 문화’ 전반적 위축
제주시 우도에 위치한 동네 책방 ‘밤수지맨드라미’는 우도에 있는 유일한 책방이다. 사진은 작가를 초대해 우도 주민들이 문화활동을 누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의선 대표는 “회당 30만~40만원이라는 지원 금액은 턱없이 부족해도 평소 만나기 어려웠던 작가들을 초대할 수 있었는데 예산 지원이 사라져 이제는 그런 활동을 못 할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작은 문화들이 모여서 양질의 콘텐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정부가 지역 서점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의선 제공

“책 판매는 어렵고 제작비는 껑충 뛴 상황에서 저희 같은 1인 출판사한테는 정부 지원이 큰 힘이 되거든요. 예고도 없이 이렇게 예산을 없애버리니 타격이 큽니다. 우리나라는 작은 출판사들이 많고, 그 출판사들이 책 생태계의 실핏줄 역할을 하고 있어요. 실핏줄이 터져버리면 과연 회생할 수 있을까요?”

동물책만 내는 1인 출판사 ‘책공장더불어’의 김보경 대표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출판진흥원)이 해마다 우수 콘텐츠를 공모해 출판사(600만원)와 저자(300만원)를 지원해온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13억원 규모) 사업과 5인 이하 중소출판사들과 작가를 지원하는 ‘중소출판사 출판콘텐츠 창작지원’(7억원) 사업이 올해부터 중단됐기 때문이다. 두 사업 모두 저자의 창작활동과 출판사의 생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특히 첫 책에 도전하는 작가나 그런 작가를 발굴하려는 작은 출판사들한테 큰 도움이 돼왔는데 관련 예산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작가나 출판사들의 출판 의지가 꺾이면서, 김 대표 말대로 한국 출판·독서계에서 ‘실핏줄’부터 터지고 있다.

출판진흥원 쪽은 한겨레에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공고를 묻는 전화가 많이 오고 출판사나 작가들이 아쉬움을 많이 토로해 진흥원도 난감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 사업을 중단한 것은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가 지난해 6월 중소출판사를 체계적으로 지원하겠다며 ‘중소출판사 성장도약사업’을 새로 내놨기 때문이다. 기존 사업을 대체한다는 새 사업은 설계 방향조차 아직까지도 구체화되지 않았다. 한철희 돌베개 대표는 “판매는 어려워도 가치 있는 책들을 펴내는 데 도움을 줬던 정부 지원이 사라지면 출판사의 의욕이나 의지가 크게 위축된다. 얼마 안 되는 지원액마저 이렇게 잘라버리는 것은 전례조차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문체부가 올해 독서·서점·도서관·출판 관련 정책을 흔들고 예산을 대폭 삭감하면서 ‘책 생태계’에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콘텐츠 제작, 독서운동, 문화활동 등 책을 중심으로 이뤄지던 지원이 사라지자, 출판사·작가뿐 아니라 도서관·서점 등 시민들이 책과 만나온 ‘현장’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나오고 있다. 시민들이 책을 통해 누려온 문화 향유 기회마저 사라지는 모양새다.

출판·독서 분야에서 없어진 정부 지원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국민독서문화증진 지원사업’(2023년 기준 60억원)이다. 영유아들에게 ‘책꾸러미’를 지원하는 ‘북스타트’, 각종 독서모임을 지원하는 ‘독서동아리 활동’, 연중 캠페인인 ‘책의 해’ 행사 등이 이 예산에 주로 기댔는데, 올해 예산이 통째로 사라졌다. ‘북스타트’의 경우 양육자가 책꾸러미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연수 프로그램이 포함되는데, 예산 부족으로 올해부터 연수 프로그램 등은 제공되지 않는다. ‘독서동아리 활동’ 사업 역시 정부 지원에 힘입어 전국 400개 독서동아리에 활동비(연 80만원)를 지원했지만 올해부터 활동비는 사라지고, 동아리들이 모여 활동을 공유하는 행사도 치르지 못하게 됐다. 대표적인 독서 캠페인인 ‘책의 해’ 사업은 지난 몇년간 정부 지원을 받아 해마다 연령대별로 풍성한 행사를 벌여왔는데, 올해 ‘2024 어린이 책의 해’는 민간 재원으로 치러야 한다.

독서 활동의 허브인 도서관·서점 쪽도 울상이다. ‘도서관 정책 개발 및 서비스 환경 개선’ 예산은 지난해에 견줘 52억4천만원, ‘도서관 기반 조성’ 예산은 30억원 넘게 삭감됐다. 기반 시설 확충뿐 아니라 도서관의 핵심 활동인 각종 문화 프로그램 운영이 타격을 받게 됐다. 사립 작은도서관인 양재리본숲도서관의 최승아 대표는 “작은도서관들은 정부나 지자체 지원이 아니면 운영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은데, 공모사업 자체가 줄어 올해 어떤 행사를 몇번 할지 아직 계획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서점도 마찬가지다. ‘지역 서점 문화활동 지원’ 예산(6억5천만원)이 모두 삭감돼, 한국서점조합연합회에서 정부 지원을 받아 진행하던 ‘오늘의 서점’, ‘심야책방’ 같은 사업들도 모조리 사라졌다. 지난해 ‘오늘의 서점’에 선정돼 다양한 작가들을 초청할 수 있었던 강원도 동해시 여행전문서점 ‘잔잔하게’는 올해 문화행사 규모를 대폭 줄이기로 했다. 채지형 대표는 “책방은 수익이 적어 유명 작가를 지방까지 모실 여력이 없다. 정부 지원으로 작가를 초대해 지방에서도 주민들이 유명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돈을 삭감했으니 주민들의 문화공간이 사라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대체로 ‘중복성 있는 사업을 폐지하고 지역사회 중심의 책 읽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구체적인 방안은 나온 것이 없다. 지난해 문체부는 출판·독서 관련 기존 사업들에 ‘문제가 있다’며 여러 차례 잡도리를 했는데, 출판·독서계에서는 출판·독서 관련 정부 지원을 줄이려는 것이었다고 의심한다. 정부가 선정·구매를 통해 양서 출판을 지원해온 ‘세종도서’ 사업은 지난해 정부가 ‘부실투성이’라 지적한 뒤 문학 분야 ‘문학나눔도서’ 사업과 통폐합되면서 예산이 25억원 줄었다. 한국 대표 도서전인 서울국제도서전도, 정부가 지난해 ‘수익금 보고·반환’을 문제 삼아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를 제척한 뒤 올해부터 민간 재원으로만 치러야 하는 상황이다. 출판문화를 떠받쳐온 제도인 ‘도서정가제’에 대해서도 정부는 웹툰·웹소설, 지역서점 등에 그 적용을 완화하겠다고 천명한 상태다.

출판·독서계에서는 “책 읽으라고 캠페인을 벌여도 모자랄 판에 정부가 ‘책 읽지 말라’고 앞장서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현재 정부는 돈이 되는 문화 사업에만 관심을 갖고 일상의 문화에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문화의 뿌리가 되는 책 문화를 이렇게 배제한다면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문화 활동을 향유하는 시민들에게 간다”며 “조속히 관련 예산을 복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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