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양 극단에 있지만... 두 연방대법관 “우리 모두 같은 색깔의 법복 입어”
“왜 우리는 ‘반대 의견’을 지우려고 하거나 의견이 다른 사람을 ‘반대 진영’ 소속으로만 간주해야 할까요.” 12일 오후 미국 워싱턴 DC 조지워싱턴대에서 ‘시민 교육’을 주제로 진행된 대화 형식의 강연에서 에이미 코니 배럿(52) 대법관이 이렇게 말하자 옆에 앉은 소니아 소토마요르(70) 대법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20년 지명한 배럿은 동성애에 부정적이고 낙태 합법화에 반대하며, 총기 소지 권리를 옹호하는 강경 보수 성향 백인 판사다. 반면 소토마요르는 뉴욕 슬럼가의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2009년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 지명으로 최초 히스패닉 대법관이 됐다. 둘은 거의 모든 쟁점에서 정반대 입장에 있다. 하지만 소토마요르는 이날 “(배럿의 발언에) 동감한다”며 “대법원에서도 각자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와 동료 모두 선의를 갖고 (합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미 연방대법원에서 좌우 이념을 각각 대변하는 소토마요르(진보)와 배럿(보수) 두 대법관은 이날 공동 강연에 함께 나와 대법관들 간 대화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판결문 외에 개별 의견 내기를 극도로 꺼리는 대법관들이 외부 행사에 참석해 대법원 내 화합을 언급한 건 이례적이다. 두 대법관은 총기·낙태·이민 등 미국 사회의 첨예한 사안들마다 이견을 보여왔다. 그러나 이날은 “법관들 간 대화로 (의견) 차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미국 사회의 갈등 해결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행사는 이념 대립이 심각한 미국 사회의 쟁점들을 최종 판단하는 연방대법원이 갈수록 ‘보수화’된다는 논란이 거세지는 가운데 열렸다. 현재 대법원은 9명 중 공화당 대통령이 지명한 판사가 6명인 ‘보수 우위’ 구도다. 대법원은 2022년 낙태권을 보장한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폐기했다. 작년에는 대학 신입생을 뽑을 때 소수 인종을 우대하는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리는 등 대형 사안에서 대부분 보수 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 과정에서 보수 판사 6명과 진보 판사 3명의 의견 대립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지적과 함께 대법원에 대한 미 국민의 신뢰도가 하락하고 있다는 여론조사도 이어졌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의 ‘대선 출마 자격’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맡게 되면서 대법원 내 ‘이념 갈등’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이를 의식한 듯 두 판사는 대법원 내 회의 분위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배럿은 “아무리 첨예한 사건이라도 대법관들은 회의에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고 했다. 소토마요르는 “때때로 누군가가 (회의 도중) 의견이 달라 상처를 주는 발언을 할 수 있다”며 “그러나 이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격한 논쟁이) 벌어지면 선배 판사가 개입해 ‘사과를 하는 건 어떠냐’고 중재하기도 한다”며 “대법관들은 사건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으면서 점심 식사를 하거나 서로의 집에서 저녁을 먹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배럿은 “동료애가 판사의 ‘원칙’까지 바꾸게 하지는 않겠지만 의견 차이가 있더라도 서로 항상 만나고 대화한다”고 했다. 판결의 방향은 다르더라도 미 국민에게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제시하기 위해 최대한 조율 절차를 거친다고 했다.
대법관들은 지정된 좌석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데, 배럿은 선배 소토마요르와 테이블 맞은편에 앉는다고 한다. 소토마요르는 “판결을 두고 토론할 때의 규칙은 점심을 먹을 때 건너편에 있는 동료를 쳐다봐도 죄책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만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배럿이 “(종신직인) 대법관들은 이혼할 가능성이 없는 ‘중매 결혼’을 한 사이”라고 하자 청중이 웃음을 터뜨렸다.
두 대법관은 지난달 말에도 전미 주지사협회 행사에 참석해 “(법관들 간 이념은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색인 검은색 법복을 입는다”고 했다. 워싱턴 정가에선 “보수 법관 중 그나마 이념적으로 유연한 배럿이 친밀한 사이인 소토마요르와 함께 경색된 대법원 내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시도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한편 좌우 진영 일각에선 의구심도 표하고 있다. 최근 강성 보수로 분류되는 다른 대법관들이 잇따라 외부에서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대법원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고 있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일종의 ‘이벤트’ 아니냐는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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