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제자들의 꽉 막힌 가슴을 뚫어주십시오

김한중 前 연세대학교 총장 2024. 3. 1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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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모두 지방 아닌 서울서 발생
보험 정책 전환 없으면
매년 2000명 늘려도 소용없어
대통령은 부디 토론과 설득을
의대정원 증원에 반대하는 전공의들의 집단 행동이 이어지고 있는 13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2024.3.13/뉴스1

존경하는 윤석열 대통령님.

고희를 훌쩍 넘긴 노인은 침묵하는 것이 큰 덕목인 줄 알면서도 국사에 바쁘신 대통령께 글을 올리는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평생 가르쳐온 제자들이 환자 곁을 떠나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환자와 국민들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죄송스럽습니다. 의료 정책을 전공하고 정부 정책 수립에 참여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늘 같은 사태가 일어난 것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제자들에게도 면목이 없습니다.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제출하기 시작할 때 한 소아청소년과 전공의가 쓴 사직의 글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 전공의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현재도 임신 중입니다. 회사원인 남편이 진급을 포기하고 2년간 육아휴직을 감내했고 복직 후에는 양가 부모님들의 헌신으로 하루하루를 버텨왔습니다. “태교는커녕 잠도 못 자고 컵라면도 제때 먹지 못하고, 병가는커녕 수액 달고 폴대를 끌어가면서 근무에 임했다”는 임산부 전공의의 사연을 읽을 땐 눈물이 흘렀습니다. 엄마도 보지 못한 채 소아 중환자실에서 눈을 감는 환아의 마지막 모습과 말들을 잊을 수 없었고, 이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책임감으로 꼭 제대로 된 실력 있는 의사가 되기를 다짐했다고 합니다. 왜 이런 헌신적인 의사도 사직을 결심했을까요?

의대생, 전공의로서 고된 경험에 지쳐 있을 뿐 아니라 이번에 발표된 필수 의료 패키지 정책과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는 것이 누적된 의료 현장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사를 연간 2000명씩 늘려도 보험 정책을 전환하지 않으면 필수 의료 붕괴는 막을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과 믿음 때문에 제자들의 가슴은 멍이 들고 꽉 막혀버린 상태입니다. 이 답답함과 불신이 제거되지 않으면 현 사태는 빠른 시간 안에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정부가 발표한 필수 의료 4대 패키지는 논리적으로 구성이 잘되어 있어 논술시험 답안으로 보면 만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과는 괴리감이 큽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두 번째로 적지만, 의사 수가 훨씬 많은 나라들에 비해 국민 건강 수준, 이용률, 만족도가 모두 높습니다. 의사 수 부족 현상으로 인용되는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아산병원 간호사 뇌출혈 사망은 의사 수와 크게 관계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의사 수가 많은 서울에서 발생한 일들입니다.

정부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으나, 의사들의 경험과 예측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각자의 판단이 맞다는 확신이 커질수록 나와 다른 생각을 갖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대립하게 됩니다. 벌써 3주 이상 지속되고 있는 의료 사태는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전공의들의 빈자리를 지키기 위해 수술, 외래, 당직을 번갈아 하는 교수들의 피로가 곧 한계에 달하는 문제도 있지만, 제자들의 일방적 희생으로 사태가 마무리될 때 교수들은 어찌 해야 되겠습니까?

대통령님.

심장 혈관이 막힌 환자들에게는 스탠트를 심거나 수술을 해 심장 근육에 피가 돌게 해야 합니다. 소통과 대화로 제자들의 꽉 막힌 가슴을 뚫어주십시오. 경청하시고, 토론하시고, 설득해 주십시오.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아 떠나는 선한 목자의 리더십을 보이시고, 위기 상황에서 조정 능력을 보여 주십시오. 이 일이 지금 가장 중요한 민생 회의 어젠다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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