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시간 걸려 간 맥캘란 증류소…실망한 이유 [김지호의 위스키디아]
위스키계의 롤스로이스로 평가받는 맥캘란은 올해로 200주년을 맞았습니다. 맥캘란이라는 브랜드는 더 이상의 마케팅도 필요없어 보입니다. 이제는 위스키 스스로 스토리텔링을 하면서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저기서 돈다발을 들고 서로 팔아달라고 줄 서는 게 새롭지도 않습니다.
대체 맥캘란은 어떻게 이런 상위 포식자 위치에 설 수 있게 됐을까요? 매번 새로운 역사를 갱신하고 있는 맥캘란 증류소에 직접 찾아가 봤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 여정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27시간에 걸쳐 도착한 맥캘란 증류소
맥캘란 증류소는 투어 예약이 어렵습니다. 증류소는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나흘간만 방문할 수 있고 겨울철에는 주말에만 운영합니다. 예약 없이는 증류소 부지 근처까지 가기도 어렵습니다. 예약도 늘 매진이라 취소표라도 만나는 운이 필요합니다. 투어 참가자는 최대 6~8명으로 하루에 두 번, 식사가 포함된 특별 투어는 하루 단 한 번만 진행되므로 여타 증류소에 비해 진입장벽이 높은 편입니다.
서울에서 글래스고까지 ‘도어 투 도어’ 꼬박 24시간, 렌터카로 글래스고에서 맥캘란 증류소까지 하이랜드 지역의 산길을 굽이굽이 지나 또 3시간. 스코틀랜드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길 새도 없이 비좁고 울퉁불퉁한 2차선 도로와 가로등 하나 없는 산길을 통과해야, 비로소 맥켈란 증류소에 닿을 수 있습니다. 웅장한 대문을 지나 60만평에 가까운 맥캘란 부지에 들어서면 300여년 전에 지어진 ‘이스트 엘키스 하우스’가 보입니다. ‘맥캘란의 정신적인 고향’으로 불리는 이 집은 맥캘란 위스키 라벨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집 내부는 새로 리모델링을 했지만, 외부는 삼각형 지붕에 4개의 뾰족한 굴뚝이 올라온 전통 스코틀랜드 양식 별장 모습 그대로입니다.
약 2400억원을 들여 새로 리모델링을 마친 증류소는 하나의 거대한 우주선과 같습니다. 단순히 증류소라고 보기엔 그 규모가 압도적이고 광활합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외계인들이 지구에 식민지를 꾸려놓은 듯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처음으로 디즈니랜드 성을 본 듯한 설렘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2014년 공사에 들어간 증류소는 설계 준비만 6년이 걸렸고 공사를 시작한 지 4년 만인 2018년 완공되었습니다. 목재 구조로 뒤덮인 지붕은 스페이사이드의 들판 풍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했다고 합니다. 맥캘란의 건축 디자인은 런던의 밀레니엄 돔과 여의도 파크원 프로젝트 등을 진행한 영국의 로저스 스터크 하버 파트너스가 담당했습니다.
증류소에 들어서면 총 840개의 맥캘란 병으로 장식된 아카이브 공간이 눈에 띕니다. 이곳에는 1840년부터 현재까지 출시된 위스키 398병과 프랑스 크리스털 공예 회사인 라리크 등과 협업한 디캔터 시리즈 19병, 플라스크 시리즈 4병으로 구성된 공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맥캘란의 200년 역사를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역사관인 셈입니다.
맥캘란이 소장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병은 1848년 빈티지 제품입니다.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투박한 형태의 빈 병이지만 돈으로는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유명 협업 제품들과 위스키계의 롤스로이스라는 별칭을 갖게 된 ‘억 소리 나는 역사’가 한 자리에 모여있습니다.
넋 놓고 아카이브 시설들을 둘러보고 나면 증류소로 이동합니다. 맥아의 당화, 발효, 증류 공정의 가장 핵심이 되는 시설입니다. 최신식 증류소를 구축한 맥캘란은 36대의 증류기와 21개의 발효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유난히 짜리몽땅하고 두툼한 몸통을 가진 증류기입니다. 보통 증류기 목이 길면 스피릿(Spirit: 증류액)의 풍미가 가볍고 섬세한 반면, 목이 짧고 두꺼울수록 묵직하고 기름진 풍미를 끌어낸다고 합니다. 여기서 후자에 해당하는 맥캘란의 스피릿은 실제로 묵직한 과일과 초콜릿 등의 풍미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테이스팅 공간으로 이동하면 총 4가지의 위스키를 맛보게 됩니다. 이번에 맛본 제품은 맥캘란 12년, 15년, 18년 그리고 숙성연수 표기가 없는 나스 제품입니다. 특이한 점이라면 맥캘란 12년 셰리 오피셜이 아니라 면세 전용으로 나온 컬러 시리즈였습니다. 비록 오피셜과 마찬가지로 알코올 도수 40%로 출시된 제품이지만 맛은 기존 12년 셰리보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맥캘란 특유의 후추 향신료와 건포도, 견과류 풍미가 다소 옅지만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왔습니다.
이어서 마신 제품은 유러피언 오크와 아메리칸 오크를 섞은 맥캘란 15년 더블 캐스크. 가격은 맥캘란 12년에 비해 두 배지만 맛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기존 12년 제품에 살짝 바닐라 풍미가 가미된 정도. 가장 기대됐던 맥캘란 18년 셰리는 2023년에 릴리스 된 제품이었습니다. 셋 중에서는 가장 맛이 괜찮긴 했지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은 썩 좋지 못했습니다. 나이 지긋한 미국의 노부부는 맛이 예전 같지 않고 너무 심심하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 가격에 이런 맛이라면 구매에 있어 고민이 좀 된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음한 나스 제품도 큰 호응을 얻진 못했습니다.
시음을 마친 뒤, 아쉬운 마음에 ‘맥캘란 바’로 이동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정말 귀한 위스키 한잔 정도는 마셔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제품이 맥캘란 2018년 익셉셔널 싱글 캐스크. 평소 구경도 하기 어려울뿐더러 해외에서 600만원은 들여야 구매가 가능한 제품입니다. 그런데 30밀리 기준 한 잔 가격이 40파운드로 병값을 생각하면 나름 합리적이었습니다. 코를 대는 순간 바로 직감했습니다. 아, 이건 내가 평소에 마셨던 맥캘란이 아니구나. 향에서는 복숭아와 다크초코렛, 바나나 푸딩이 직관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위스키를 한 모금 입술 사이로 흘려보내는 순간 진한 과일 조림과 초콜릿 푸딩을 떠먹는 듯했습니다. 한참 동안 바깥 경치를 즐기며 30분에 걸쳐 잔을 비웠습니다. 그야말로 환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오피셜 보틀들에 대한 아쉬움은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추억 보정으로 남은 맥캘란의 맛
1970~80년대 출시된 맥캘란 ‘올드보틀’을 즐겼던 위스키 마니아라면 오늘날의 맛에 만족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맥캘란 제조의 공식 레시피는 변하지 않았어도 오크통의 상태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맥캘란 하면 셰리 위스키가 떠오를 것입니다. 맥캘란이 오랜 기간 수많은 위스키 마니아들의 취향을 만족시켜줬던 제품이 바로 셰리 위스키이기 때문입니다. 맥캘란은 위스키의 풍미가 80% 이상은 오크통에서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그만큼 오크통의 품질에 자신감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맥캘란이 최초로 셰리 오크통에 주목한 것은 1874년입니다. 당시 피노 셰리 오크통에 담겨 보관되던 위스키가 남다른 풍미의 원천임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맥캘란이 지금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것도 양질의 셰리 오크통들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1986년 셰리 와인은 무조건 산지인 스페인에서 병입되야 한다는 법령이 생깁니다. 맥캘란은 생각지 못한 제작 단가 인상과 추가 운송비를 감당해야 했겠지요. 기존 전통을 바꿀 수 없었던 맥캘란은 헤레스 지역 셰리 업자들과 새로운 유통 계약을 맺었고 현재는 스페인 남서부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는 ‘테바사’ 쿠퍼리지와 협업하고 있습니다. 셰리 위스키에 필요한 모든 공정 과정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제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 셈입니다. 헤레스는 셰리 와인으로 가장 유명한 지역으로 맥캘란의 근간이 되는 곳이라고 봐도 무관할 것입니다.
최근 10여년 동안 셰리 위스키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그중 맥캘란은 셰리 위스키의 보증수표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누구나 맥캘란을 찾기 시작했고, 수요 대비 공급량은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셰리 오크통 수급이 부족해진 맥캘란은 시즈닝 된 오크통을 선택합니다. 이는 셰리 오크통 제작을 위해 구색만 갖춘 셰리를 만들어 오크통에 단기간 숙성하는 방식입니다. 기존 진짜 셰리를 담았던 오크통에서 숙성한 위스키 맛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이러한 셰리는 대부분 상품성이 떨어져서 식초를 만드는 데 사용됩니다.
위스키 증류소는 단순히 증류 시설을 확대하고 인원을 충원시킨다고 공급량이 바로 늘어나지 않습니다. 맥캘란의 공식 라인업이라면 최소 10~12년 동안 오크통에서 인내의 시간을 가져야 소비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18, 25, 30년 같은 고숙성 제품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최소 10년 후의 수요와 소비자들의 입맛을 예측해야 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셰리 오크통만으로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맥캘란은 오크통을 섞기 시작합니다. 고급 유러피언 셰리 오크통 외에 상대적으로 저렴한 버번위스키를 담았던 아메리칸 오크통까지 사용하게 된 것이지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단종되는 위스키들이 발생하고 숙성연수조차 표기되지 않은 나스 제품들이 시장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맥캘란의 충성 고객들에게는 꽤 불편한 상황이었죠. 하지만 이 또한 ‘한정판’이라는 날개를 달고 불티나게 팔려버립니다. 맥캘란은 굳이 좋은 오크통에서 고급 위스키 원액을 꺼내 쓸 이유가 사라진 것이죠. 반면 고급 원액은 몇 년만 더 숙성시켜도 그럴싸한 타이틀을 달고 최소 2배, 많게는 10배 이상 비싼 값에 거래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겠지요.
최근 오피셜 제품들도 맛이 예전 같지 않다는 평이 지배적입니다. 심지어 구형 맥캘란 12년이 현행 맥캘란 18년보다 더 맛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특히 맥캘란 18년의 국내 출시가는 몇 년 사이 26만원에서 60만원대까지 오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2배 이상 오른 가격에 상응하지 못하는 맛에서 발생하는 실망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스키 마니아들에게도 맥캘란은 더 이상 음용이 아닌, 수집의 역할이 더 커진 듯합니다.
맥캘란이 좋은 위스키를 만든다는 데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숙성고에서 최상급 원액들이 살아 숨 쉬며 익어가고 있겠죠.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높아진 인기에 물량을 늘리면서 위스키 마니아들에게 사랑받던 맥캘란의 셰리 맛은 소비자들에게 더 멀어진 듯 합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라는 말이 위스키에서만큼은 적용되지 않길 바라는 건 저의 욕심일까요. 구형 맥캘란을 찾아서 오늘도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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