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아버지의 디지털 일상

기자 2024. 3. 1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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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깨우는 전화벨 소리. “뭘 잘못 눌렀는지 TV가 안 나온다. 오늘 올 수 있니?” 다급한 아버지 목소리다. 온종일 TV를 끼고 사는 아버지를 위해 좋아하시는 바둑을 볼 수 있게 유튜브를 세팅한 후, 나름 철저히 반복 학습을 시켜드리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오늘은 못 간다고 하니 전화를 툭 끊으신다. 두 시간쯤 후 “관리사무소 직원이 와서 해결해주고 갔다”는 아버지 문자를 받고, 괜한 민폐를 끼친 것 같아 찜찜했다. 이번엔 TV가 문제였지만, 디지털 기계와 관련한 이런 일은 아버지와 자식들에게 이제 일상이 되었다.

고령화와 디지털 격차는 이미 전 국가적 이슈다. 당연히 관련 대응책은 쏟아지고 있고, 지역에서 무료로 교육을 제공하는 기관도 많다. 아버지도 경로당에서 배웠다며 뜬금없이 사진과 문자를 툭 보내는가 하면, 이상한 문자는 절대 누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계신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문제는 노인과 디지털 일상이 종종 예측불허일 만큼 광범위하다는 거다. 얼마 전 장노년의 디지털 격차 해소를 위해 조성된 센터에서 상담을 담당했던 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던 내용이 많아 놀랐다.

한번은 잔액이 없는 계좌들을 해지하고 싶어 하는 고령자가 찾아왔는데, 통장이 너무 많아 일일이 은행에 가기는 버겁고, 부모의 세세한 금융 정보까지 자식한테 보여주는 건 내키지 않아 고심 끝에 왔다고 한다. 또 장애로 한쪽 손 사용이 어려워 문자 발송이 불편했던 분이 있었는데 음성인식을 활용해 간단한 문자를 보낼 수 있는 기능을 알려드리니 너무 기뻐했다는 일화도 있다. 길찾기 앱 활용이 서툴러 생고생 중인 고령의 배달 일용직 노동자 사연도 있었다. 미처 옮길 수 없는 민감한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정말 별의별 사례가 많았다. 모쪼록 현장의 이런 생생한 사례들이 그냥 흘러버리지 않게 정책에 잘 반영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고령자 편의를 돕는 새로운 기술은 계속 나오지만, 본인에게 필요한 것을 단박에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설사 찾더라도 활용하기까지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지자체에서 전문센터를 조성해 상담과 교육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막대한 예산이 드는 하드웨어를 마냥 늘리는 것도 능사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당장은 지역 곳곳에 있는 경로당, 노인복지관, 주민센터가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게 기능을 보강하고 중장년들을 전담 매니저로 상주하게 하는 등 실질적 방안이 병행되면 좋겠다. 이런 게 디지털 격차 해소를 위한 생활밀착형 생태계가 아닐까?

“어차피 다 쓰지도 못하는데, 뭔 기능이 그리 복잡하고 많은지.” 관리사무소에 연락한 일로 한소리 하니 아버지가 한숨쉬며 한마디 툭 던진다. 디지털 세상에서 노인들은 점점 작아지는 듯하다. 그런데 이게 아버지만의 모습일까? 스마트하지 못하다고 툭하면 아들에게 핀잔 듣는 나는 다를까? 며칠 전에도 스마트폰 몇번 터치로 해결할 수 있는 새 기능이 있다는 걸 몰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던가. 어차피 학습 속도보다 기술 속도가 빨라 따라잡긴 불가능할 것이고, 노화까지 가중될 테니, 점점 더 스마트해지는 세상에서 어떻게 품격과 자존감을 지키며 노년을 살아갈지 새로운 숙제가 더해졌다.

남경아 <50플러스 세대> 저자

남경아 <50플러스 세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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