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나를 놓치지 않기로
모처럼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정월대보름을 보냈다. 한 친구의 생일에 맞춰 약속을 잡는데 마침 음력 정월 보름날이다. 한집에 모여 오곡밥 짓고 묵나물 볶아 한 해 기복까지 더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더랬다.
절기를 제법 챙겨왔다. 시작은 2012년 무렵이다. 지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갖게 마련인 서울살이를 향한 막연한 바람이 내게도 있었는데, 서울살이 6년째로 접어들던 때 콩깍지가 벗겨졌다. 다람쥐 쳇바퀴는 비유가 아니라 실재였고, 서울살이가 본래 팍팍한 법이라고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유행하는 옷차림 정도로 가늠하고 있는 내 일상이 참 서글펐다. 무엇보다 서울에서 사는 게 시시해지다니… 딴에는 충격이었다. 서울내기들은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 거란 지레짐작에 마음이 더 뾰족해지기도 했다. 당장에 서울을 떠나는 것은 어쩐지 회피하는 것만 같아 내키지 않았다. 궁리 끝에 삭막하기만 한 이 도시에서 최소한 제철을 감각할 수 있다면 숨이 좀 트이지 않을까 싶어 절기를 챙겨보기로 했다. 무슨 무슨 데이라고 부르는 기념일을 챙기듯 입춘을 기념하고, 한로를 즐기는 거다.
옛 풍속을 답습하지는 않았다. 나는 도시 생활자라는 내 위치에서 그때그때 누릴 만한 거리를 찾았다. 옛사람들이 한 해 농사일을 준비하며 농기구를 정비하고, 고로쇠물 마시며 새 기운을 받았다는 요사이 경칩 주간이면 집에 있는 약상자를 정리하고, 밥상에 봄나물을 올리는 식으로 말이다.
꽤 효과가 있었다. 무언가를 기념한다는 것만으로 일상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됐고, 나는 다람쥐 쳇바퀴와는 다른 맥락에서 재발라졌다. 절기가 보름에 한 번꼴로 돌아오는 데다 정월대보름이나 단오 같은 명절까지 더하자 웬만큼 바지런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 한편 서울에도 계절이 흐르고 있음을 알아챘다. 봄이면 천변에 쪼그리고 앉아 냉이를 캐고, 가을이면 은행을 줍는 동네 어르신들이 있었다. 그 곁에서 냉이랑 잡초는 뭣이 어떻게 다른지 능청맞게 대거리도 했다. ‘달래는 태안이 좋다더라’ ‘미나리는 청도가 일품이라지’ 하는 류의 전에 몰랐던 정보를 접할 때면 그 핑계로 훌쩍 떠나보기도 했고, ‘내년에는 강릉단오제에 꼭 가고야 말겠어’ 하고 두어 계절 미리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재미있겠다’ ‘다음엔 뭐 해?’ 죽이 맞는 친구들과는 언젠가 동짓날에 동지고사를 지내며 함께 벽사를 하기도 했다.
한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이 재미를 미루고 지냈다. 해오던 가락이 있으니 그냥 넘기기 뭣하다 싶을 때면 방송에 나오는 들나물을 캡처해 ‘오늘은 춘분, 들나물 캐러 가고 싶은데…’ 하는 글귀와 함께 SNS에 올렸다. 보여주기식이었다. 고백컨대 올해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친구들이 오곡밥 짓고 묵나물도 볶자고 했을 때 속으로 ‘아이고’ 했다. ‘그 재료를 다 어떻게 준비하니, 한 번 먹자고 그 부산을 떨어야겠니’ 하는 말도 삼켰다. 그간 절기를 챙기는 척했던 날들이 스쳐 지났고, 친구들의 흥도 깨고 싶지 않았다.
한 친구가 장을 보겠다고 나섰다. 시장에 가면 한두 번 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오곡밥 재료를 조금씩 소분해 꾸러미로 판다고 했다. 친구 말대로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서울 도심의 상설시장에도 오곡밥 꾸러미를 내놓은 상인이 있었다. 부럼 꾸러미를 내놓은 집도 찾았다. 이렇게 조금씩 파는 줄은 몰랐다고 말을 건네자 상인은 이젠 핵가족도 아니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렇다고, 혼자 살아도 대보름에 오곡밥 한 그릇 먹고 부럼 깨기도 해야 사는 재미가 있지 않겠냐고 말을 보탠다. “자, 내가 더위 살 테니 땅콩 한 입 깨물어 봐요.”
친구들과 든든하고도 즐겁게 대보름을 보내곤 나는 가만히 나를 다그쳤다. 스스로 ‘사는 재미’를 찾으려 애써 알게 된 이 재미를 왜 또 미루며 지냈나. 내 일상을 경쾌하게, 관계는 촘촘하게,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범주는 넓게 만드는 이 경험을 더는 미루지 말자고 되뇐다.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내 서사는 내가 만들어야 한다고. 삶의 순간순간 알맞은 때를 놓치는 것은 나를 놓치는 일일지 모른다.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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