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중환의 진화의 창]왜 상상의 세계에 빠질까

기자 2024. 3. 1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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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친자’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가? <듄>에 미친 사람이란 뜻이다. <듄>은 서기 2만6391년에 우주에서 가장 귀한 자원 ‘스파이스’를 독점하고자 벌이는 갈등을 담은 SF 영화다. 듄친자들은 영화 <듄: 파트2>를 기꺼이 극장에서 ‘n차’ 관람한다. 10만원이 넘는 6권짜리 소설 전집을 베스트셀러에 등극시킨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수십년 전 소설가 프랭크 허버트가 꾸며낸 세상에서 등장인물들이 스파이스를 두고 싸우건 말건 우리는 알 바 아니지 않나(듄의 세계관을 해설하는 유튜브를 다 시청하고 소설 전집까지 덜컥 산 내 중학생 아들에게 간청하는 말은 아니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구의 세계에 사람들이 깊이 빠져드는 모습은 물론 너무나 친숙한 풍경이다. 소설 <반지의 제왕> 3부작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엄청난 흥행을 했다. 영화 <스타워즈>는 미국의 건국 신화로 자리 잡았다. 소설 <해리 포터>는 전 세계를 강타했다. 만화 <드래곤 볼>은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만화다. 소설 <걸리버 여행기> <1984>, 영화 <어벤져스> <투모로우>, 드라마 <킹덤> <왕좌의 게임>, 비디오 게임 <던전 앤 드래곤> <젤다의 전설> 등 목록은 길게 이어진다.

판타지, SF, 모험, 슈퍼 히어로, 지구 멸망, 디스토피아 등등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의 세계를 그리는 픽션이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끄는 까닭은 무엇일까?

진화심리학자 에드가 두보르그와 니콜라 보마르는 탐색 가설을 제안했다. 우리의 먼 조상은 항상 옮겨 다니는 유랑 생활을 했다. 익숙한 곳에 주야장천 눌러앉아 음식, 주거지 같은 자원이 점차 바닥나는 파국을 맞기보다는, 새로운 곳을 줄기차게 탐색하여 자원을 꾸준히 확보하는 편이 더 나았다. 낯선 장소에 왠지 이끌리는 선호가 자연 선택된 것이다. 상상계를 다루는 소설, 만화, 영화, 게임 등은 이러한 원초적 선호를 자극하여 현대인에게 즐거움을 안긴다. 마치 큰 눈과 아장아장 걸음마 같은 인간 아기의 고유한 특성을 귀엽다고 여기게끔 진화한 심리가 아기와 비슷한 특성을 지닌 푸바오에 의해 뜻하지 않게 작동되는 것처럼 말이다.

흥미롭게도, 상상의 세계를 창조한 작가들은 탐색 가설과 부합하는 말을 남겼다. <반지의 제왕>을 쓴 영문학자 J R R 톨킨은 판타지 소설에 대한 열광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섬이나 먼 도시의 탑을 보았을 때 우리가 느끼는 본질적인 보상감”에서 유래한다고 했다. <젤다의 전설>을 만든 미야모토 시게루는 “낯선 도시를 처음 탐색할 때의 그 기분을 똑같이 느끼게 해주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상상계를 누비는 픽션이 원래 낯선 자연풍경에 이끌리도록 진화한 선호를 예기치 않게 작동시킨다는 가설이 맞다면, 현대인이 상상에 기반한 픽션을 즐기고 소비하는 정도는 성별, 나이, 성격 등에 따라 체계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첫째, 조상 여성이 식물성 음식을 채집할 때 조상 남성은 낯선 곳을 널리 다니며 동물을 사냥했으므로, 남성은 여성보다 상상의 세계에 평균적으로 더 빠져들 것이다. 둘째, 아이와 청소년은 낯선 곳을 탐색했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더라도 부모가 배 속을 든든히 채워 줄 것이므로, 어리거나 젊은 사람은 나이 든 어른보다 상상의 세계에 더 빠져들 것이다. 셋째, 성격 5요인 중 하나인 개방성은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 모험심, 공간 인지 능력과 연관되므로 개방성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상상의 세계에 더 빠져들 것이다.

두보르그와 보마르는 참여자 230명에게 로맨스, 전쟁, 하이틴, 스릴러, 가족, 전기, 상상계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대한 선호를 물었다. 예측대로, 상상계를 그린 영화를 매우 좋아한다고 답한 이들은 남성이고, 어리거나 젊고, 개방성이 강한 경향이 있었다. 아이들이 요정, 드래건, 마법사, 공주, 용사가 활약하는 판타지라면 정신을 놓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요컨대, 상상의 세계를 담은 픽션에 오늘날 우리가 빠져드는 까닭은 낯선 환경을 탐색하여 유용한 정보를 얻도록 진화한 마음이 뜬금없이 픽션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독자가 상상의 세계에 대한 정보를 애타게 갈구하기에, 작가는 줄거리와 무관한 배경지식을 점점 더 많이, 더 상세히 제공하게 된다. 열성 팬들은 톨킨이 만든 인공 언어인 엘프어를 배운다. <해리 포터>에 나오는 가상의 스포츠인 퀴디치를 실제로 경기한다. 포케몬 도감에 나오는 1000마리 이상의 포케몬 이름을 줄줄 외운다.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진화심리학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진화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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