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민 심판 "첫 아시안컵 여성심판 등판 앞두고 큰 수술… 주변 믿음 덕에 재기"

정필재 2024. 3. 13.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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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느끼는 순간에도 기다려주고 응원해 준 분들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됐죠.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한국 축구가 자랑하는 국제 여성 심판인 김경민(43) 심판은 힘들었던 시간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 심판은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가진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지난해 1월23일 5시간이나 전신마취를 하는 큰 수술을 받았던 일을 떠올렸다.

축구선수였던 김 심판이 진로를 바꾸게 된 건 부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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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21년차 국제 여성심판
여자월드컵 6개월 앞두고 부상
FIFA에 포기 의사 전달했지만
"우린 널 기다릴 것" 답 돌아와
입원 중에도 피나는 운동 매진
뜻밖의 기회에 카타르서 새 역사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느끼는 순간에도 기다려주고 응원해 준 분들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됐죠.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한국 축구가 자랑하는 국제 여성 심판인 김경민(43) 심판은 힘들었던 시간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축구선수였던 김 심판은 부상과 극복을 반복하다 꿈을 접었고, 또 큰 부상으로 월드컵과 첫 아시안컵 여성 심판을 포기해야 할 위기에 몰렸다.

김 심판은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가진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지난해 1월23일 5시간이나 전신마취를 하는 큰 수술을 받았던 일을 떠올렸다. “호주·뉴질랜드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 월드컵을 6개월 앞둔 상황이었어요. 수술 얼마 전 월드컵에 배정 통보를 받았는데 마음이 아팠죠. 수술을 앞두고 FIFA에 ‘월드컵에 나서지 못할 것 같다’고 전했어요. 그랬더니 FIFA에선 ‘우리는 널 기다리겠다’라는 답이 오더라고요. 아시아축구연맹(AFC)에서 응원해줬고요. ‘헛살지 않았구나, 꼭 돌아가야겠구나’ 생각만 들었습니다.”

김경민 심판이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무사히 수술을 마친 김 심판은 입원 중 피 주머니가 터져 바지가 젖는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운동을 했다. 매 경기 10㎞ 이상 뛰어야 하고 대회 전 체력테스트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김 심판은 아파도 쉴 수 없었고, 무통주사까지 맞으며 버텼다. “믿어주신 분들 덕분에 큰 도움이 됐어요. 퇴원 후에도 남편(최민병 전 심판)이 지겨웠을 텐데 늘 미역국을 끓여 주며 회복을 도와줬죠. FIFA에서도 저를 배려해주더라고요. 제 복귀 첫 경기로 17세 여자 경기를 잡아줬어요. 체력 부담이 크지 않은 경기였죠. 결국 전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됐고 프랑스와 브라질 경기에 나섰죠. 경기가 끝나고 정말 펑펑 울었습니다.”

김 심판은 카타르에서 아시안컵 첫 여성심판이라는 역사도 만들었다. 이 대회 중국과 레바논전 부심을 맡았다. “사실 지난 여자 월드컵에서 결승전에 나설 기회가 있었는데 놓쳤어요.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AFC에서 저에게 기회를 주더라고요. 정말 모든 걸 다 쏟아붓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최선을 다했어요. 아쉬움은 전혀 없이요. 할 수 있는 걸 다 했으니 귀국하는 비행기에서도 후련하더라고요.”

비디오판독(VAR)에 대해서는 꼭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자격증을 따긴 했지만 반대했어요. 하지만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잘못된 판정 하나에 결과가 바뀔 수 있고 누군가의 노력이 사라질 수 있으니까요.”

김 심판은 오프사이드를 잘 볼 수 있는 노하우도 살짝 공개했다. “경기 전 선수들이 몸 푸는 모습을 자세히 보면 어떤 선수가 어느 정도 빠르고, 패스는 어떻게 한다는 게 보여요. 그런 점을 감안하면 판정을 내리기 전 장면이 잘 확인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믿어야 돼요. 본 대로 판정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축구선수였던 김 심판이 진로를 바꾸게 된 건 부상 때문이었다. 김 심판은 중학 시절엔 왼쪽 윙과 포워드를 봤고 고등학교 땐 키가 크다는 이유로 수비수가 됐다. 잠시 키퍼를 보기도 했던 김 심판은 결국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이어가지 못했다. “중학교, 고교, 대학 때 모두 같은 부위 골절을 당했어요. 골수암을 의심받으면서 축구를 접어야 했죠. 그때 어린아이들을 지도하는 일을 맡게 됐고, 축구에 대해서 더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심판 교육을 받다 이 길로 들어서게 됐죠.”

올해로 국제심판 21년 차인 김 심판의 꿈은 뚜렷하지 않다. 매 경기 모든 걸 쏟다 보니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저 무난한 심판이 되고 싶어요. 튀지 않고 어떤 경기를 펼쳐도 안정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반짝이기보다 묵묵한 그런 심판이요.”

정필재 기자 rus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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