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에게 말하기[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
그들은 왜 꿀벌에게 말할까?
영국의 풍속화가 찰스 네이피어 헤미(Charles Napier Hemy, 1841~1917)의 작품이다. 한 부인과 어린 아들이 고인이 된 남편이 돌보던 양봉장을 거닐며 꿀벌들에게 그의 죽음을 알리고 있다. 서유럽 지역의 오랜 풍습인 '꿀벌에게 말하기(Telling the bees)'를 묘사한 풍속화다. 꿀벌에게 말을 한다고?
최근에도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했을 때, 궁정 양봉가인 존 채플은 버킹엄궁에서 기르고 있던 수만 마리의 꿀벌에게 이 슬픈 소식을 알렸다. 이 임무는 영국 왕실의 오랜 전통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꿀벌 애호가였으며 수년 동안 궁전 부지에 많은 벌통을 두고 돌보았다. 존 채플은 벌통 주위에 검은 리본을 달고 하나하나 살살 두드리면서 꿀벌들에게 부고를 전했고, 이제는 새 주인인 찰스 3세가 그들을 잘 돌봐줄 것이라고 속삭였다.
'꿀벌에게 말하기'는 왕실만의 전통은 아니다. 수백 년 동안 유럽 지역의 양봉인들이 해온 오랜 관습이었다. 일반적으로 이 관행은 꿀벌을 치는 집안 가장의 죽음을 벌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여왕의 양봉가가 그랬듯이, 사람들은 벌통을 검은 천으로 덮고, 그 옆에 케이크, 비스킷, 와인 등 장례식 음식을 놓아두고, 벌통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조용히 주인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벌들이 벌통을 떠나거나 꿀 생산을 중단하거나 죽는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주인의 사망뿐 아니라 결혼식이나 아기의 탄생 등 가족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중요한 일에 대해 벌들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양봉인들은 자신이 기르는 꿀벌들과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도 가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집안의 소식을 공유하려고 한 것이다. 심지어 결혼식에 꿀벌을 초대하기도 했다. 이때 새로운 출발을 하는 부부의 행운을 빌기 위해 벌통을 꽃이나 진홍색 천으로 장식하고, 웨딩 케이크 한 조각을 남겨 두었다. 또 신혼부부가 살림집으로 갈 때 꿀벌에게 자신들을 소개했는데, 안 그러면 결혼 생활이 불행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미신적이지만 사랑스러운 전통은 켈트족의 민속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켈트족의 민담에 의하면 꿀벌은 이 세상과 사후 세계를 연결하는 메신저로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꿀벌로 나타난다고 한다. 사람들은 꿀벌을 불멸하는 영혼의 상징 혹은 앞날을 예견하는 특별한 지혜를 가진 존재로 여기고, 그 행동 역시 주의 깊게 관찰했다. 벌들이 죽은 나뭇가지 주위에 모여 있으면 누군가의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했고 지붕 위에서 쉬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믿었다. 지역 공동체 내에 불화가 생기면 꿀벌이 꿀 생산을 중단하거나 죽거나 날아가버린다고 여겼다. 꿀벌이 죽었을 때는 애도의 시간도 가졌다.
인류는 선사시대부터 벌꿀을 채집했다. 스페인의 한 선사시대 동굴에서는 꿀을 채집하는 모습을 그린 8,000년 된 벽화가 발견되었다. 양봉을 시작한 것은 적어도 5,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고대 이집트의 신전이나 파라오의 무덤에서 벌을 뜻하는 상형문자가 발견되었으며, 기록물에는 양봉법도 언급돼 있다. 꿀벌은 인간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꿀은 감미료와 약으로 사용되었고 밀랍은 양초와 화장품 등으로 널리 쓰였다. 유럽 중세 수도원과 가정집에서는 대체로 양봉을 했으며, 사람들은 꿀벌을 매우 소중히 여기고 보살폈다.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곤충이나 가축을 돌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들에 대한 애정이 싹트기 마련이다. 꿀벌에게 이야기하는 기이한 관습은 벌과 인간 사이에 깊은 유대 관계가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친밀감이 '꿀벌에게 말하기' 풍속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작물의 30% 이상이 꿀벌에 의한 수분에 의존한다. 사과, 딸기, 양파, 호박, 당근 등은 꿀벌에 의한 수분 의존율이 90% 이상이라고 한다. 만약 꿀벌이 사라진다면? 단순히 맛있는 과일들을 먹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서 심각한 식량 위기에 맞닥트리게 될 것이다. 최근 꿀벌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생물학자들은 살충제, 기생충, 지구 온난화 등이 주요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몇 년 전, 꿀벌을 죽이고 있는 살충제 사용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파리 중심가에 모여 상징적인 꿀벌 장례식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다. 이 모의 장례식은 인간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꿀벌을 존중하고 마치 가족처럼 대한 '꿀벌에게 말하기' 전통의 정신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꿀벌이 멸종하면 인류가 그 뒤를 이을 가능성이 높다. 꿀벌 장례식은 인간의 생존이 꿀벌의 운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꿀벌들이 떠난다면, 인간을 비롯한 지구 생명체 대부분이 소멸하는 그날은 예상보다 더 빨리 올지도 모른다.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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