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치계의 ‘명예 낙인’ [세상읽기]

한겨레 2024. 3. 13.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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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2024 총선 여성주권자행동 ‘어퍼’ 출범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차별과 폭력, 불평등에 맞서 성평등 민주주의를 실현할 정치를 만들 것’을 선언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암울하고 각박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가끔 들려오는 의인들의 이야기가 있다. 부당하게 곤경에 처했거나 폭력에 시달리는 피해자들을 자기 힘껏 돕는 사람들 말이다. 지난해 한 편의점에서 어느 20대 남성이 “페미니스트는 좀 맞아야 한다”면서 20대 여성을 폭행했던 일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그저 방관자에 머무르지 않고 온몸으로 피해자를 보호했던 50대 남성이 있었다. 그는 중상을 입어 수술을 받아야만 했는데, 뿌옇게 가려진 상처 사진만 봐도 나는 울컥 눈물이 났다.

어쩌면 생각보다 자주 이런 의인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하다. 덕분에 우리는 이 사회에서 희망을 보고 위로를 얻는다. 물론 단순히 감동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돈쭐’을 내주기도 하고, 커피값을 아껴 작은 후원금을 보태기도 한다. 그렇게 공동체를 지키려는 연대자들 덕분에 비뚤어진 세상도 조금씩 바로잡힐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피해자와 약자의 곁을 꿋꿋하게 지킨 사람들을 우리가 존경하기 때문에, 비록 내 몸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지는 못할지라도 나 역시 뭐라도 하고 싶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믿음이 아직 남아 있다면 바로 이런 윤리가 우리를 보호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의 윤리가 철저하게 배반당하는 세계가 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권력형 성범죄 피해자를 용기 내 도왔던 이들이 “너의 정치 인생은 끝났다”는 말을 들으며 쫓겨났던 곳. 권력과 이해관계에 굴하지 않고 피해자의 곁을 지킨 의인들이 외압과 외면을 견디다 못해 평생의 꿈과 정치경력을 포기해야 했던 곳. 놀랍게도 이 억압은 현재진행형이어서 그들은 여전히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걷잡을 수 없는 2차 가해를 비판했던 황두영은 ‘컷오프’(공천배제)로 경선조차 하지 못했다. 김지은을 위해 법정에서 증언했던 신용우는 후보자 검증을 신청했지만 아예 답을 듣지 못했다. 적격도 부적격도 아니라니? 반대로 피해자를 비방했던 이들은 문제없이 공천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더 묵과할 수 없어 여성단체들은 며칠 전 공동성명을 냈다. 선거 때마다 이런 일이 반복될까?

한국 사회는 낙인의 힘이 엄청난 사회다. 불행히도 그런 낙인은 종종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향한다. 거기에 민주당은 2차 가해로 새로운 낙인을 더해서, 피해자와 싸운 모든 이들에게도 함께 낙인이 찍혔다. 어빙 고프먼은 이를 ‘명예 낙인’이라고 불렀다. 어떤 집단에서 비천하고 비난받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의 주변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낙인이다. 명예 낙인이 찍힌 사람들은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그가 당하는 사회적 배제와 피해를 함께 겪는다. 그리고 민주당에서 피해자의 편에 섰던 이들은 그렇게 따돌림을 당하며 축출당했다.

과연 이것이 온당한가? 피해자의 편에 선 의인들이 배척당하고, 가해자를 옹호하며 거짓을 말하는 이들이 영전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당신은 부당한 힘에 맞서 약자를 지켰다가 명예 낙인이 찍히는 사회를 원하는가? 그렇게 의인을 응원하는 사람도 사라지고, 그래서 의인도 사라진다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물며 평범한 우리의 이웃도 약자를 위해 몸을 던지는데, 입법자와 위정자에게 그런 윤리가 없다면 그들이 나라를 이끌 수 있을까?

‘명예 낙인’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가해자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다. 피해자를 외면하고 가해에 동참한 이들의 비도덕성을 살아 있는 증거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것이 아닌 고통을 기꺼이 떠안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은 가해자들의 심기를 건드린다. 결국 끝까지 잡아떼고 서로 자리를 보전해주며 자신들의 과거를 조직적으로 정당화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이 역사를 끝내 직시하지 않을 것인가?

불과 며칠 전에도 시민사회의 반대로 2차 가해자를 경선 후보에서 급히 제외하는 일이 있었다. 물론 2차 가해자들을 영구 추방하라는 뜻이 아니다. 사과와 반성 없이 지금도 가해자로 살고 있는 이들에게 당 차원에서 면죄부를 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정치를 하기 전에 과오를 인정하고 거듭나는 것이 순서다. 자신의 잘못에 온전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죄인으로 남는다는 뜻이 아니라 온전한 자기 해방을 뜻한다. 민주당 역시 그렇게 책임지고 변화함으로써 오랜 짐을 내려놓고 해방될 수 있다. 그제야 비로소 떳떳하게 국민의 선택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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