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출발선에 선 타일러 글래스나우[줌 인 MLB]
A : 130경기(129선발) 818이닝 49승48패 ERA 3.95 818삼진-519볼넷 WHIP 1.43 bWAR 7.6
B : 488경기(474선발) 3317.1이닝 254승118패 ERA 3.13 4057삼진-978볼넷 WHIP 1.11 bWAR 95.9
A와 B는 모두 같은 투수의 성적이다. 다름 아닌 ‘빅유닛’ 랜디 존슨이다. A는 존슨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1988년부터 1992년까지 거둔 성적이고, B는 1993년부터 은퇴시즌인 2009년까지의 기록이다.
208㎝ 장신인 존슨은 초창기 100마일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펑펑 뿌려대는 강속구 투수였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단점 또한 명확했으니, 바로 좀처럼 잡히지 않는 ‘영점’이었다. 어떤 때는 삼진 10개 이상을 잡아내는 무시무시한 피칭을 보였지만, 또 어떤 때는 볼넷을 남발하는 등 기복이 심했다. 1985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존슨을 뽑은 몬트리올 엑스포스(현 워싱턴 내셔널스)가 불과 11번의 메이저리그 등판 기회만 주고 그를 시애틀 매리너스로 트레이드한 것도 제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시애틀에 와서도 존슨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120-152-144개의 볼넷으로 최다볼넷 3연패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특히 1992년 5월27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전부터 7월22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전까지는 8연패의 치욕을 겪었는데, 이 기간 존슨은 43.2이닝을 던져 42개의 볼넷을 내줄 정도로 흔들렸다.
하지만 그 해 존슨은 자신의 야구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될 결정적인 만남을 갖게 됐다. 시즌 중반 시애틀과 텍사스 레인저스의 시리즈가 열릴 당시, 텍사스에서 선수 생활의 말년을 보내고 있던 놀란 라이언을 찾아간 존슨은 제구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라이언은 당시 자신의 전담 코치였던 톰 하우스와 함께 분석에 나섰고, 결국 원인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투구를 할 때 내딛는 오른발 뒤꿈치가 미세하게 3루 쪽으로 향했고, 이에 온전히 포수 쪽을 향해 실어야 할 추진력이 분산된다는 것이었다.
이후 존슨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존슨은 통산 4805개의 탈삼진을 잡아내 라이언(5714개)에 이어 역대 2위에 등극했고 라이언(324승), 스티브 칼튼(329승·4136탈삼진), 로저 클레멘스(354승·4672탈삼진)와 함께 300승·4000탈삼진을 모두 달성한 4명 중 한 명이 됐다. 클레멘스(7회)에 이어 역대 2위에 해당하는 사이영상 5회 수상과 함께 2004년에는 메이저리그 최고령 퍼펙트게임 기록(40세251일)까지 경신하며 전설이 됐다.
2011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었던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트레버 바우어와 UCLA의 원투펀치로 활약했던 오른손 강속구 투수 게릿 콜을 뽑았다. 그리고 5라운드에서 고교 투수 타일러 글래스나우를 지명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북쪽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뉴홀 출신인 글래스나우는 고등학교 시절 그리 주목받는 투수는 아니었다. 패스트볼 구속이 좋은 것도 아니었고, 제구 문제 또한 있었다. 하지만 스카우트들이 글래스나우를 주목한 것은 다름아닌 그의 ‘사이즈’였다. 고등학교 입학 전만 하더라도 173㎝에 불과했던 글래스나우의 키는 고등학교 입학 후 하루가 다르게 크기 시작, 졸업 시즌에는 무려 30㎝가 큰 203㎝까지 자랐다. 피츠버그는 글래스나우의 제구력 문제가 급성장한 키로 인해 딜리버리와 릴리스 포인트가 키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라 판단했고, 구속 또한 프로 입단 후 체계적인 관리를 통해 체중을 늘리면 올라갈 것이라고 봤다.
예상은 적중했다. 글래스나우는 마이너리그에서 착실하게 운동에 매진하면서 체중과 구속을 모두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프로 입성 초기 80마일 후반대에 머물던 패스트볼 구속은 어느덧 90마일을 훌쩍 넘어 100마일에 육박하는 수준이 됐다. 그리고 무서운 기세로 마이너리그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어떤 피츠버그 선수도 글래스나우처럼 주가를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이 가녀린 오른손 투수는 90마일 중반대의 패스트볼과 가파르게 꺾이는 브레이킹볼, 두 개의 플러스 피치를 갖고 있다. 힘을 더하고, 선발 투수에게 필요한 두 가지 C(커맨드와 체인지업)를 더욱 다듬으면 좋은 3선발급 투수로 발전할 수 있다.” (베이스볼 프로스펙터스, 2014년)
“제이미슨 타이욘이 팔꿈치 부상을 당한 이후, 글래스나우는 자신을 향한 관심이 늘어나는 것을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변함없이 파워 패스트볼과 해머 커브로 리그를 지배하고 있다. 전반적인 결과는 좋은 안정성을 보이지만, 계속되는 제구 문제는 나쁜 측면이다. 그 원인(일정하지 않은 딜리버리와 보폭)은 교정 가능하지만 해결되지는 못했다. 좀 더 이 부분에 일관성을 갖게 되면, 선발 로테이션의 중간이라는 평가를 뛰어 넘을 기회가 생길 수 있다.” (베이스볼 프로스펙터스, 2015년)
“글래스나우의 스터프는 충분히 높은 퀄리티를 갖고 있다. 그의 패스트볼과 커브는 모두 플러스, 또는 그 이상의 등급을 갖고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눈에 안약을 넣어야 할 정도의 정밀함(제구력)은 필요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저리그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하기 전 트리플A에서 풀시즌을 보내는 것이 그에게 나쁜 결과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베이스볼 프로스펙터스, 2016년)
글래스나우는 차분하게 메이저리그 데뷔를 기다렸다. 타이욘을 통해 쓴맛을 봤던 피츠버그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6년 7월8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가졌다. 결과는 5.1이닝 4실점 패전. 하지만 신인 투수의 데뷔전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후 문제가 발생했다. 고교 시절부터, 그리고 마이너리그 시절에도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던 제구 문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016년 7경기(4선발)에서 9이닝 평균 5.0개의 볼넷을 내줬던 글래스나우는 이듬해 그 수치가 6.4개로 더 크게 상승했다.
피츠버그는 2018년 글래스나우를 불펜에서 시작하게 했지만 34경기에서 5.5개로 좀처럼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를 빠르게 포기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크리스 아처를 데려오며 오스틴 메도스와 글래스나우, 그리고 추후지명선수로 탬파베이가 선택한 셰인 바즈를 보냈다. 피츠버그에 재앙이 된 이 트레이드로 인해 닐 헌팅턴 단장, 클린트 허들 감독은 결국 해고됐다.
당시 탬파베이는 LA 다저스와 함께 스트라이크존의 높은 곳을 공략하는 하이 패스트볼, 그리고 낙차 큰 브레이킹볼 조합을 선도하는 구단 중 하나였다. 레이 시라지 투수코치의 주도하에 ‘싱커 전략’을 고수하던 피츠버그는 그 대척점에 있던 팀이었다.
탬파베이에 오면서, 글래스나우의 영점은 빠르게 잡히기 시작했다. 이적 후 11경기 모두 선발 등판해 9이닝 평균 볼넷을 3.1개로 낮춘 글래스나우는 이듬해 12경기에서 6승1패 평균자책점 1.78을 기록했고, 볼넷 수치도 2.1개로 더 낮췄다. 2020년 3.5개로 다시 올라갔지만, 이후로는 더 이상 3.0개를 넘지 않고 있다.
탬파베이의 노선이 글래스나우에게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제구력이 이렇게 극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어떤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존슨에게 라이언이 은인이었던 것처럼, 글래스나우에게도 소중한 인연이 있다.
글래스나우가 탬파베이로 온 2018년은 블레이크 스넬이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한 시즌이다. 당시 탬파베이의 에이스였던 스넬은 글래스나우에게 심리적인 부분을 강조했다. 스넬은 “2017년만 하더라도 나는 그저 ‘공을 던지고 있다’라는 생각만 했다. 내 머리 속에 만약(If), 그리고(And), 하지만(But) 이라는 단어는 없었다”며 “무엇이 동기를 부여하는지, 무엇이 자신을 최고로 만드는지를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술적인 부분만 생각하던 글래스나우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여기에 카일 스나이더 투수 코치와의 미팅은 글래스나우가 자신의 구위에 확신을 갖는 계기가 됐다. 스나이더 코치는 글래스나우와의 미팅에서 “단순한 말이긴 하지만 타격은 어렵다. 그리고 널 상대로 타격하는 것은 특히 더 어렵다”며 자신감을 심어줬다.
또 고교 선배인 트레버 바우어처럼 급속도로 발전한 ‘분석 야구’의 신봉자이기도 한 글래스나우는 탬파베이 이적 후 초당 700프레임을 촬영하는 슈퍼슬로모션 카메라인 에저트로닉을 이용, 자신의 메커니즘을 프레임 별로 체크하고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즉각적으로 반영했다. 이를 통해 글래스나우는 자신의 패스트볼이 왜 커터와 비슷한 무브먼트를 갖는지도 알게 됐고, 처음에는 고치려고 애를 쓰다가 이내 적응,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일반적인 패스트볼과 섞어 던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2021년부터는 슬라이더까지 추가하며 패스트볼-커브 투 피치 투수라는 오명에서도 벗어났다.
피츠버그의 글래스나우 : 56경기(17선발) 141.1이닝 3승11패 ERA 5.79 152삼진-91볼넷 BB/9 5.8 bWAR -1.7
탬파베이의 글래스나우 : 71경기(71선발) 388.1이닝 27승16패 ERA 3.20 526삼진-121볼넷 BB/9 2.8 bWAR 8.6
2022년 8월 탬파베이와 2년 3035만 달러의 연장계약을 체결했던 글래스나우는 올해 연봉이 2500만 달러로 뛰는 상황이었다. 이에 글래스나우의 연봉을 감당하기 버거웠던 탬파베이가 트레이드 시장에 글래스나우를 올렸고, 수많은 팀들이 경쟁을 펼친 끝에 LA 다저스가 2대2 트레이드를 통해 글래스나우를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다저스는 글래스나우를 영입하자마자 그에게 2025년부터 시작하는 4년 1억1150만 달러 연장계약을 선물했다. 올해 연봉을 더하면 5년 1억3650만 달러에 달하는 대형 계약이다. 글래스나우에 야마모토 요시노부까지 영입한 다저스는 야마모토, 글래스나우에 지난 시즌 신인으로 좋은 활약을 한 바비 밀러, 베테랑 제임스 팩스턴과 시즌 중 돌아올 워커 뷸러, 클레이튼 커쇼가 성공적으로 복귀하면 무시무시한 선발 로테이션을 구축하게 된다(여기에 내년 시즌에는 오타니 쇼헤이가 다시 투타겸업을 시작한다).
제구 문제를 해결한 글래스나우의 또다른 문제는 건강이다. 글래스나우는 데뷔 후 한 번도 규정이닝을 채운 적이 없다. 어깨, 팔꿈치, 발목, 사근 등 부위도 다양하다. 한창 좋은 시즌을 보내던 2021년에도 토미존 수술로 시즌을 일찍 마친 적이 있다.
하지만 글래스나우는 3년 만에 치르는 시범경기에서 절정의 페이스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달 25일 LA 에인절스전에서는 1.2이닝 1실점으로 부진했지만, 2일 클리블랜드 가디언스전(3이닝 5탈삼진 노히트)과 13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전(5.1이닝 8탈삼진 노히트)에서는 무시무시한 투구를 보였다. 특히 최고 98마일까지 나온 샌프란시스코전에서는 이정후와 두 차례 승부를 2루 땅볼-좌익수 플라이로 요리하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선수 생활 내내 발목을 잡았던 부상 이슈는 아직까지 없다. 글래스나우는 20~21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리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메이저리그 정규시즌 개막 2연전인 ‘서울 시리즈’의 1차전 선발로 나서는 것이 확정됐는데, 그에 맞춰 페이스를 빠르게 끌어올리고 있다. 늘 발목을 잡았던 부상 이슈는 아직까지 없다.
“부상은 확실히 짜증나고, 정신적으로 여러가지를 시험한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매일매일 작은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면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마치 롤러코스터와도 같았지만, 목표를 하루하루 지키는게 큰 도움이 됐다. 내가 배운 여러가지 것들 중 가장 첫 번째다.”
다저스로 오는 것이 확정된 뒤 글래스나우가 한 말이다. 지긋지긋한 부상은 글래스나우에게 많은 시련을 안겼지만, 한편으로는 강한 인내심을 선사했다. 끝내 제구 문제를 해결한 존슨처럼, 역시 제구 문제를 이겨낸 글래스나우는 이제 ‘건강한’ 시즌을 보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다시 출발선에 섰다. 존슨이 반전을 만들어낸 것은 29세 시즌. 글래스나우가 처음으로 100이닝 이상을 던지고 10승 투수 반열에 올랐던 2023년도 29세 시즌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윤은용 기자 plaimsto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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