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체의 죽음과 부활 [크리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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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콘은 인쇄체밖에 읽을 줄 몰라요." 아동 문학의 고전인 '비밀의 정원'(1911)에서 한 등장인물이 냉담하게 말한다.
그러나 이 환상 자체는 20세기 타이프라이터의 보급으로 현실에서 제 역할을 잃은 필기체의 불안정한 처지를 반영하고 있다.
국가가 필기체를 국민에게 교육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필기체는 펜을 쥐고 쓸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 특성 때문에 스마트 기기가 아이들에게서 박탈한 '쓰기'를 회복하기 위한 도구로 은퇴 뒤에 소환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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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디콘은 인쇄체밖에 읽을 줄 몰라요.” 아동 문학의 고전인 ‘비밀의 정원’(1911)에서 한 등장인물이 냉담하게 말한다.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는데 왠지 저 대사는 기억에 남아 있다. 디콘은 일종의 필수 요소인 ‘야생의 소년’이다. 필기체를 못 읽는 건 학교에 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 여자아이는 그렇다면 디콘이 알아볼 수 있게 인쇄체로 편지를 써보겠다고 말한다. “그래 본 적은 없지만 가능은 할 것 같다”면서 말이다. 필기체가 기본값이고 인쇄체가 예외인 세상. 판타지 소설의 설정처럼 느껴진다. 이게 110년 전이다.
2022년 월간지 ‘애틀랜틱’은 미국 대학 강의실의 난감한 풍경을 소개한다. 남북전쟁에 관한 교재를 읽는데 수록된 사진 자료에 나온 간단한 필기체 구절을 못 읽는 학생이 수강생의 3분의 2였던 것이다. 그럼 필기체를 쓸 줄 아는 학생은? 읽을 줄 아는 학생의 수보다 당연히 적었다. “뭐라고? 아니 여러분들 지금까지 서명은 어떻게 해온 건가요?” 교수는 곧 진상을 깨닫는다. 학생들의 서명은 필기체가 아니었다. 그건 인쇄체를 대충 꾸불꾸불 갈겨쓰는 식으로 각자가 ‘창조한’ 필체에 불과했다.
우리가 서양 필기체 하면 떠올리는 귀족 사회 응접실과 깃털펜의 이미지는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주입된 환상에 가깝다. 그러나 이 환상 자체는 20세기 타이프라이터의 보급으로 현실에서 제 역할을 잃은 필기체의 불안정한 처지를 반영하고 있다. 국가가 필기체를 국민에게 교육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일상생활의 읽고 쓰기가 필기체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렇지 않다면 딱히 국가가 자원을 투입할 이유는 없어진다. 2010년 미국 연방정부는 필기체를 필수 교육 항목에서 제외했다. 위 학생들은 그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이들이다.
그러나 필기체의 운명을 애도하기는 이른 듯하다. 2023년 캘리포니아주는 폐지했던 필기체 교육을 부활시켰다. 이로써 연방정부의 지침과 무관하게 자체적으로 필기체를 가르치기로 결정한 주는 24개로 늘어났다. 기사에 따르면 이 결정은 전통주의자와 진보파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필기체의 죽음에 초당적으로 제동을 건 것이다. 인접국 캐나다도 작년 필기체 교육에 복귀했다.
왜일까? 왜 하필 지금일까? 이는 뜬금없는 회고 취미가 아니라 기술 발전이 촉발한 불가피한 결정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2023년은 3년간의 코로나19 팬데믹이 공식적으로 끝난 해이다. 그동안 많은 시간을 집에서 오직 스마트 기기와 함께 보낸 뒤 학교에 복귀한 아이들의 상태는 교육자들에게 심각한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진지하게, 필기체는 인쇄체와 경쟁하기 위해 돌아왔을까? 글자 모양은 여기서 현안이 아니다. 필기체는 펜을 쥐고 쓸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 특성 때문에 스마트 기기가 아이들에게서 박탈한 ‘쓰기’를 회복하기 위한 도구로 은퇴 뒤에 소환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물론 현실은 성인들도 폰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글자를 쓰는 일’ 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들이 똑같이 그래도 괜찮을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필기체 교육이 폐기됐던 2010년, 스마트 기기는 막 출시되었을 뿐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필기체가 사라졌던 것보다 빠른 속도로, 쓰기라는 행위 자체가 인간에게서 삭제되고 있다. 한국도 똑같이 겪는 문제이다. 그리고 한글에 필기체가 없다는 것은, 이 삭제를 지연시킬 보호 장비 하나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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