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론직설] “R&D ‘선택과 집중’으로 전략산업 지원, 성장엔진 재점화해야”
반도체·양자컴퓨터·차세대 원전 등 전략 기술 전폭 지원
학문간 벽 허물고 교육 개혁 서둘러 융합형 인재 육성을
다양성·포용성 문화 확산으로 여성 과기인 역할 늘리고
정치 외풍에 흔들리지 않도록 일관된 연구 시스템 절실
글로벌 경제·기술 패권 전쟁이 가열되면서 첨단 과학기술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시대를 맞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공계 기피 현상까지 겹쳐 고급 인재 확보를 통한 초격차 기술 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따라 여성 과학기술인들의 경력 단절을 막기 위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여성과총) 회장인 권오남 서울대 수학교육과 교수는 13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선택과 집중을 통한 성과 기반의 연구개발(R&D) 예산 시스템을 마련해 성장 엔진을 재점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내년 R&D 예산과 관련해 “반도체, 양자컴퓨터, 차세대 원전, 사이버 보안 등 전략적 기술 분야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또 “다양성과 포용성의 문화를 조성해 디지털 여성 인재를 육성하는 데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과학기술 분야의 인재난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반도체·2차전지·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에서 더 극심한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에는 이공계 석·박사과정 대학원의 졸업생이 감소하고 있어서 걱정스럽다. 의대 쏠림 현상은 이공계 기피 현상을 더욱 부추길 가능성이 높다. 이를 개선하려면 이공계 분야에 특화된 인재를 키울 수 있도록 대학 교육 및 선발 시스템을 전면 개편해 다학제 교육 활성화, 기초과학 교육 강화, 글로벌 협업 확대 등을 추진해야 한다. 파격적인 인센티브 도입과 장학금 확대 등 우수 인재를 키우고 해외 두뇌를 유치하기 위한 지원 정책도 필요하다.
-대학의 폐쇄적 구조가 인재 육성에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무엇보다 경직된 교육 시스템이 큰 문제다. 학과 중심의 대학 구조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통합하고 다학제적 협업을 늘리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 현장과 따로 노는 교육 시스템이 초래하는 인력의 미스매칭 현상도 심각한 수준이다. 융합적 사고와 창의적 능력은 기존 학문의 경계를 넘어서는 교육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대학은 학문 간 벽을 허물고 교육과정을 혁신적으로 재구성해 학생들로 하여금 다양한 학문 영역을 자유롭게 탐색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대학이 지식 창출과 혁신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융합 인재를 효과적으로 양성할 수 있다.
-여성 과학 인력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은데.
△여성 인재를 양성하려면 편견 없는 학습 환경과 정책 및 기금 지원, 성 평등 문화 조성 등의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무엇보다 사회 전반적으로 포용성과 다양성을 중시하는 문화가 폭넓게 뿌리내려야 한다. 국제 컨설팅사 맥킨지에 따르면 임원진의 성별 다양성이 높은 상위 25% 기업은 하위 25% 기업보다 수익률이 평균 25% 높았다. 우리도 성별 다양성을 사회 혁신과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핵심 전략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여성 인력의 경력 단절이 큰 문제로 등장했는데.
△우리나라는 대졸 여성의 경력 단절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이다. 전체적인 여성 고용률은 일시적으로 경력이 단절됐다가 재유입되는 ‘M자 곡선’을 보이지만 첨단산업의 경우 ‘L자 곡선’에 머무르고 있다. 기술 변화의 속도가 빨라 쉽게 복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공계 경력 단절 여성이 약 18만 8000명에 달해 기술 분야 부족 인력의 4배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여성 인력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외국처럼 유연한 근로 환경을 조성해 일과 생활의 균형을 맞추고 신산업 및 신기술에 대한 재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주요 선진국들은 인재 육성에 사활을 걸고 있는데.
△미국과 중국 등은 파격적인 지원과 혜택 제공으로 인재 육성 및 해외 두뇌 유치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일찍이 ‘스템(STEM·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의 인재를 키우기 위해 인센티브 제공과 장학금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1974년 세계 최초로 ‘부모공동육아휴직제’를 도입했던 스웨덴은 수십 년에 걸쳐 범정부 차원의 여성 인력 활용 대책을 펼치고 있다. 턱없이 부족한 인력 수요를 해결하려면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초격차 기술 개발을 위한 방안은.
△과학기술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를 맞아 획기적인 R&D 투자 확대를 통해 혁신적인 기술 개발을 촉진해야 한다. 기술 개발의 초기 단계부터 상용화까지 전 과정에 걸쳐 정책적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초과학과 응용 연구 간의 균형을 맞춰야 기술 초격차 확보도 가능할 것이다. 글로벌 연구 네트워크에 적극 참여해 첨단 기술 동향을 파악하고 공동 연구개발 기회를 모색하는 작업도 빼놓을 수 없다.
-과학기술 분야의 효율성을 높이는 대책도 시급한데.
△R&D 효율성을 높이려면 한정된 자원을 전략적 중요도가 높은 프로젝트에 우선 할당함으로써 최대의 효과를 창출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를 위해 선택과 집중을 통해 성과 기반의 R&D 예산 배분 시스템을 도입하고 사회적·경제적 효과를 정기적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비효율적 집행을 막으려면 연구 과제 선정부터 사업화까지 전 과정에 걸쳐 디지털 관리 시스템을 도입해 투명성과 책임성을 강화해야 한다.
-산학연 R&D 및 사업화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
△R&D 기반의 혁신 기술이 실험실 수준을 넘어 기술 사업화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대학과 연구소·기업들이 공동 R&D, 기술개발센터 운영, 기술이전 및 사업화 지원 등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산업계의 수요를 반영한 교육 커리큘럼과 프로젝트를 도입해 실무 경험을 갖춘 인재들을 배출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투자를 막을 수 있다. 그래야 중복 투자나 비효율적인 투자를 방지하고 산학연 간의 연계를 통해 사업화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정부가 대폭 확대하기로 한 내년도 R&D 예산은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가.
△반도체, 양자컴퓨터, 차세대 원전, 사이버 보안 등 전략적 기술 분야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려 미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대형 R&D 투자가 이뤄져야 기술 혁신을 촉진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또 국제 협력 확대와 젊은 과학자 육성을 통해 지속 가능한 연구 생태계를 갖추는 데 주력해야 한다. 한국이 유럽연합(EU) 최대의 R&D 지원 프로그램인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에 준회원국으로 참여한다면 글로벌 연구 네트워크 확대와 연구비 체계 개혁에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신산업에 진출해도 과도한 규제 때문에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얘기가 나온다.
△데이터 관리나 사이버 보안, 지식재산권 보호, 산업별 표준화, 온라인 플랫폼 운영 등과 관련된 규제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스타트업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도 낡은 규제와 기득권에 막혀 상용화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부와 관련 기관은 지속적으로 규제 환경을 검토하고 기술 발전과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시대착오적인 규제들을 개혁해야 한다.
-최근 대통령실에 과학기술수석비서관직이 신설됐는데.
△과학기술수석 임명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관련 정책을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과학기술 대통령’을 자임하면서 과학계 행사에 자주 참석할 정도로 각별한 관심을 보여왔다. 다만 과학기술 정책의 수립·집행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포괄적인 접근 방식이 부족한 점은 아쉽다. 과학 정책이 연구 현장과 충분한 공감대를 마련하지 못한 채 성급하게 추진되는 측면도 있다. 박상욱 과학기술수석이 서울대 과학학과 설립을 주도한 정책 전문가로서 현장의 폭넓은 의견을 수용해 정책 수립에 반영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4·10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최근 정치권에서 거론된 ‘수포자(수학 포기자)’ 방지 공약은 기초과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일깨워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치권은 일회성 선심 공약을 내놓기보다 정치적 외풍에 휘둘리지 않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지원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도전적인 연구를 장려하고 기초·원천 분야와 차세대 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를 확대함으로써 젊은 과학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과학계는 정파에 관계없이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되면서 학문 후속 세대의 유입 및 양성을 위한 지원책이 실행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여성과총의 올해 활동 계획을 소개해달라.
△여성과총은 80개 단체, 8만여 명의 회원이 참여하고 있는 국내 최대의 전문인 여성 단체 연합체다. 올해를 ‘여성 과학기술인이 주도하는 과학기술 혁신’이라는 2030 비전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원년으로 삼고 있다. 여성의 과학기술계 진출을 확대하는 한편 사회 전반에 포용적인 문화와 다양성·평등성을 존중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EU 등과의 국제적 네트워크 확충에도 적극 나설 예정이다.
◆She is···
1961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무학여고와 이화여대 수학교육과를 졸업했다. 서울대에서 수학 석사 학위,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를 거쳐 현재 서울대 수학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울대 여성연구소장, 한국수학교육학회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 수학교육센터장, 한국연구재단 정책자문위원,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상범 수석논설위원 ssang@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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