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가의 삶은 고통 … 희망의 상징 무지개 그렸다"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4. 3. 13.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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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아라리오 회장
천안에서 17번째 개인전
회화·조각 등 150점 전시
천안버스터미널 등 개발
미술관·갤러리도 운영
"그림 그리며 울분 치유"
'레인보우' 전시 전경. 아라리오갤러리

검은 중절모에 핑크색 재킷을 입은 노작가가 2층 규모의 거대한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을 신작으로 가득 채우고 돌아왔다. 직접 물감을 칠한, 10대처럼 '힙'한 스니커즈를 신고서.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의 '본캐'는 분명 천안종합버스터미널과 신세계백화점 천안아산점은 물론 제주 탑동 아트로드인 아라리오타운을 개발한 사업가다. 하지만 미술작품 4000여 점을 수집해 아트넷의 세계 100대 컬렉터에 단골로 꼽히는 수집가이기도 한 그가 가장 아끼는 '부캐'는 단연 작가다.

서울 회현동에서 보낸 어린 시절 남산 기슭에 걸린 신비로운 무지개의 풍경을 잊지 못해 무지개색으로 초대형 캔버스를 가득 채웠다. 200호가 넘는 초대형 화폭은 본드와 아크릴 물감으로 밝고 화사하게 변신했다. 그는 "평생에 걸친 예술적 영감이 된 무지개는 나에게 꿈, 희망, 아름다움의 동의어였고, 삶의 원동력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씨킴(CI KIM·73)의 17번째 개인전 주제는 'RAINBOW'다. 회화, 조각, 설치, 드로잉, 사진 등 다양한 장르의 신작 150여 점을 선보인다. 개막을 앞두고 11일 만난 그는 "요즘 사업가로는 아침에 1시간 정도만 할애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그림만 그린다"고 말했다.

거침없는 회화들은 본능적 끌림과 충동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림에 그치지 않고 펼쳐 보이는 청동으로 만든 사과나무 조각, 직접 그림을 그린 티셔츠와 백색의 석고로 뒤덮인 사람 조각, 비 오는 제주 거리를 찍은 사진 등으로 이어지는 주제는 작가로서의 여정을 가늠케 한다.

타임지 표지를 보고 세밀화처럼 그린 BTS와 블랙핑크, 워런 버핏과 스티브 잡스의 사이에는 자신의 초상이 그려진 2030년의 타임지 표지도 있다. 언젠가는 표지를 장식하겠다는 선언적인 그림이다. 2층에는 소품과 드로잉이 빼곡한데 그는 매일 아침 사업 업무를 마치고 나면 곧장 드로잉을 하며 작업을 구상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림이 좋은 건 상상과 생각이 사라지지 않고 바로 눈앞에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사업가로서의 삶은 늘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그림이 없었으면 울분을 토하고 두들겨 부수고 했을 거다. 이 화사한 그림에도 그 속에 고통들이 보이더라. 그림이 없었으면 그 병이 치유가 안 됐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작업실은 제주와 천안에 각각 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해외에 그림을 사러 떠났고 지금은 작업을 하느라 매주 서울·천안·제주를 오가느라 대한항공 탑승만 1168번을 했다. 1980년대에는 데이미언 허스트 작품을 보러 2박3일 영국에 가기도 하고, 뉴욕 허드슨 강변에서 리히텐슈타인과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지금은 그림을 그리느라 제주를 매주 오간다"고 말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당신 정체성이 뭐냐'라는 질문이 가장 답하기 힘들었다. 내 인물화에는 귀가 없었다. 그림을 그릴 때 백이면 아흔아홉이 안 될 거라고 했다. 그들도 이제야 믿더라. 나도 이제야 귀를 그린다. 새로운 모험과 실험을 가는 게 내 직업이다. 나는 기술자가 되는 게 싫다. 늘 새로운 모험을 떠나고 싶다."

아라리오 갤러리 5층의 약 300평 남짓한 공간 전체가 작업실로 그야말로 '맥시멀리스트의 전형' 같은 모습이었다. 수십 년간 업무와 미술 작업을 하며 수집한 게 하나도 버려지지 않고 쌓여 있다. 이번 전시에는 작업실 카펫과 붓·장갑 등 작업 도구까지도 작품으로 전시한다. 심지어 제주 올레길에서 주워 온 버려진 장화까지도 그의 집무실에 작품으로 '선택'돼 있었다.

"마르셀 뒤샹이 선택으로 미술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다. 그래서 이 쓰레기도 미술이다."

2년마다 개인전을 열고 있는 그는 이미 다음 '비엔날레'를 준비하고 있었다. 드로잉에는 가볍게 쓱쓱 그린 인물화가 유난히 많았다.

"짬이 날 때 마다 인물화를 그리고 있다. 이번 전시를 보고 아내가 그러더라. 뭐가 새롭냐고. 자존심이 확 상했다. 다음엔 다 갈아엎을 거다. 주제는 벌써 정했다. 후 아 유(Who are You?)다."

[천안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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