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경비노동자 홍모씨(72)와 노모씨(68)는 매주 나흘씩 현수막과 손팻말을 들고 자신의 일터였던 서울 강남구 대치 선경아파트로 향한다. 관리소장의 갑질을 폭로하고 숨진 직장 동료의 죽음을 추모하고, 관리소장의 해임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지난 12일 오전 11시50분, 이들은 평소처럼 아파트 정문 앞에서 현수막을 펼쳐 들었다. 현수막에는 ‘경비반장을 죽음으로 내몰고, 경비노동자를 대량해고한 가해자가 여전히 (이곳에) 근무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혔다.
현수막에 등장하는 경비반장은 박모씨다. 지난해 3월14일 박씨는 자신의 일터인 아파트 단지 내에서 투신해 숨졌다. 그가 남긴 호소문에는 “강제로 반장 직위에서 해제돼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받았다”는 내용이 담겼다. 일부 경비노동자들이 관리소장에게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홍씨가 주도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매주 화요일마다 아파트에서 집회를 열었다. 홍씨는 “사람이 죽었는데 지난 1년간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노조 운영은 순탄치 않았다. 주변에서 ‘경비원이 무슨 노조냐’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지난해 8월쯤까지 전체 경비원 76명 중 과반이 넘는 40여명이 노조에 가입했다. 홍씨는 “혼자서 싸우려니까 동력이 떨어져서 어려웠다. 죽은 사람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는 노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라며 “처음에는 ‘우리 동료가 죽었는데 책임져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나 자신도 해고됐으니 그만둘 명분이 없다”고 했다.
박씨의 사망 사건을 수사한 서울 수서경찰서는 지난해 6월 “고인이 경비반장에서 초소 근무자로 강등 처분되자 극심한 모멸감을 느껴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면서도 “관리소장의 행위가 소위 직장 내 괴롭힘이 될 수 있을지언정 범죄행위로 볼 수는 없다”며 사건을 내사 종결했다.
그나마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전해온 소식은 이들에게 힘이 됐다. 공단은 지난해 11월 “고인이 직무에서 강등돼 직업적 자긍심에 상처를 받았고, 초단기 계약으로 고용 불안정 스트레스가 상당하였을 점 등을 고려할 때 사망과 업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게 다수의견”이라며 박씨의 사망을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산재 인정 소식이 알려지자 경비원들은 아파트에서 추모식을 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지난해 말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가 경비원 대량 해고를 추진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12월 말 경비원 44명에게 계약만료가 통보됐다. 무인시스템을 도입해 관리비를 절감하겠다는 취지였다. 13일 아파트 곳곳에는 ‘보안·경비시스템 개선으로 연간 11.6억원의 경비비를 절감시켰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홍씨는 “경비원 해고 관련 의견 수렴이 졸속으로 이뤄졌다. 노조 활동을 한 사람들을 솎아낸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든다”고 했다.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이날 “해고는 용역업체에서 한 것이고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 (소장의 갑질 의혹에 대해서는) 그런 사실이 없다. 1년 전 일인데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용역업체 측은 “대표자가 변경되고 직원도 바뀌어서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 없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해고된 경비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30여 명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고 한다. 남은 이들은 관리소장 해임·해고노동자 복직 등을 요구하며 지난 1월10일부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매주 1~2번씩 시위에 나서도 있는 해고경비원 조복남씨(72)는 “‘나섰다가 위협을 당한다’는 분위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며 “무관심한 세태가 안타까워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노씨도 “‘자기들과는 관련 없다. 왜 돌아가신 건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게 부당하다고 느꼈다”며 “누군가 책임을 질 때까지 계속 이곳에서 목소리를 낼 생각”이라고 했다.
환멸감을 느끼고 일을 그만둔 이들도 있다. 조미학씨(74)는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는데 이런 결과를 얻으니 자존심이 상했다. 구청에서 관리한다고 하지만 행정명령 외에는 실질적인 대책이 없다”며 “달라지는 게 없다 보니 답답한 심정이다. 이제 이 업계에서 더 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 ‘갑질 피해’ 경비원 사망 50일···‘그 아파트’는 달라진 게 없다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5021705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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