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라이브즈’의 인연과 우연[백승찬의 우회도로]
영국 소설가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1879~1970)는 근대와 현대의 접점에서 나고 자랐다. 그가 31세에 출간한 대표작 <하워즈 엔드>는 교외의 오랜 저택 하워즈 엔드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두 가문의 이야기다. 자동차와 기차가 다니고 사람들의 이주가 조금씩 활발해지는 시기, 인물들은 신문물이 전통을 대체하는 과정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한 인물은 말한다. “자기 집과 헤어진다는 것,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을 떠난다는 것-그런 일은 일어나면 안 돼요. (…) 사람이 자기가 태어난 방에서 죽지도 못한다면, 문명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이제 태어난 방에서 죽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향’이라는 말은 무의미해졌다. 생애주기에 따라 진학·취업·결혼·출산하는 과정에서 끝없이 이주를 경험한다. 이런 주기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한곳에서 오랜 세월 정주하기는 어렵다. 집값 변동, 도시계획, 자연재해, 전쟁같이 이주를 강제하는 요인은 차고 넘친다.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선택에 관한 영화다. 서울에 살던 12세 나영은 부모를 따라 캐나다로 이주하며 친구 해성과 헤어진다. 12년 후 미국 뉴욕에 사는 나영은 페이스북과 스카이프를 통해 대학생이 된 해성과 재회한다. 둘은 옛 추억을 떠올리며 서로에게 끌리지만, 둘의 거리와 시차는 관계의 진전을 가로막는다. 다시 12년 후, 나영은 작가 레지던시에서 만난 유대계 미국인 남성 아서와 결혼했고 일이 고된 직장인 해성은 미혼이다. 해성은 휴가를 얻어 나영을 만나러 뉴욕에 온다. 나영과 해성은 24년 만에 재회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로맨스 드라마의 틀을 갖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의 풋풋한 우정이 20대 초반의 설레는 연애 감정으로 발전했다가 세상 물정 깨친 30대 중반의 미련과 체념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린다. 본격적으로 ‘연애’를 하진 않은 나영과 해성의 관계는 ‘인연’이라는 단어로 해설된다. 나영은 미래의 남편이 되는 아서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번 생에서 만난 사람은 다른 생에서 서로에게 특별한 사람이었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나영에겐 해성과 아서 모두 인연이다.
다만 나영이 해성이 아니라 아서와 맺어진 건 시간과 장소의 엇갈림 때문이다. 영화감독 아버지, 화가 어머니가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이민하길 결심했을 때, 나영은 따라야 했다. 12년 뒤엔 뉴욕과 서울이라는 거리와 시차, 갓 진입한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열망 때문에 나영과 해성은 연인이 되지 않는다. 이후 나영은 좋은 남자처럼 보이는 아서를 우연히 만났고 비교적 괜찮은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 해성의 존재가 신경 쓰이는 아서는 “네가 레지던시에서 다른 사람 만났다면? 그 사람도 뉴욕에서 온 작가고 너랑 책 취향도 비슷하고 영화 취향도 비슷하고 네 연극에 조언도 해주고 리허설이 어쩐다느니 불평도 들어주는 사람이었다면”이라고 나영에게 묻는다. 현재 나영의 옆자리에 자신이 없을 수도 있었음을 가정한다. 그러고 보면 나영과 아서의 연애와 결혼은 순전히 우연이다.
마침내 나영을 만난 해성도 비슷하게 묻는다. “12년 전 그때 내가 만약 뉴욕에 왔다면, 어땠을까? 만약 네가 서울로 올 수 있었다면. 만약에 네가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 우리 사귀었을까? 헤어졌을까? 부부가 됐을까? 우리 아이들을 가졌을까?”
어찌 보면 인생은 커다란 우연과 작은 선택의 연속이다. ‘인연’은 우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발명된 개념일지도 모른다. <하워즈 엔드>의 시대에 비해, 우리는 훨씬 예측하기 어려운 삶을 살아간다. 공간과 시간이 개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주어진다. 부모 같은 권위 있는 주변인의 결정, 세계와 사회의 변동에 휩쓸리다가 맞닥뜨린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은 크고 나는 작다.
슬퍼할 일은 아니다. 주어진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12세의 사랑스러운 나영은 과거에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아서는 한국어로만 잠꼬대하는 나영을 낯설어할 때도 있지만, 결국 나영은 서울이 아니라 뉴욕에 있다. 나영, 해성, 아서 모두 우연이 준 오늘의 선물을 기꺼이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어느 고된 날의 밤, 인연이나 전생, 후생 같은 단어를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아침이면 상념도 사라질 것이다.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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