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네가 날 물었어 호랑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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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제사 이튿날이었다.
그러다 퍼뜩 엊그제 욕실 바닥에서 잡은 지네가 떠올랐다.
지네는 마당과 밭과 집 안에 수시로 출몰하는 녀석이었고, 우리 닭들의 영양간식이므로 냉큼 잡았다.
지네는 가장 독특한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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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의 풍경동물]
할아버지 제사 이튿날이었다. 새벽마다 먼저 일어나 그림을 그린 뒤 식사 준비를 하던 옆지기가 뜻밖에도 소파에 앉아 웅크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양말을 신다가 발가락이 따끔하기에 가시가 박혔나 살펴봤지만 걸리는 게 없다고 했다. 괜찮겠지 하고 그림을 그렸는데 시간이 갈수록 고통스럽다는 거였다. 처음엔 유리 조각에 찔린 느낌이었지만, 점점 발등과 종아리까지 견디기 힘든 통증이 올라온다고 했다. 돋보기를 쓰고 살펴도 보이는 게 없었다. 얼마 전 진단받은 골다공증이 떠올랐다. 뼈가 약해지면 살짝 부딪히거나 신발을 신다가도 골절이 생기는 수가 있다던데. 지난해 액자를 옮기다 떨어뜨려 발가락이 부러졌을 때의 고통을 떠올리며 나는 골절을 의심했다. 그게 아닌 것 같다던 옆지기는 뜬금없이 뱀을 의심했다. 말도 안 돼, 마당에서 몇 번 마주치긴 했지만 집 안에 들어온 적이 없을뿐더러 아직 뱀이 나돌아다닐 계절이 아니잖아.
시골에서 병원은 너무 멀고, 문 열 시간도 아니었다. 얼음을 꺼내 찜질하며 원인을 추측하는 동시에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러다 퍼뜩 엊그제 욕실 바닥에서 잡은 지네가 떠올랐다. 어린놈이었다. 지네는 마당과 밭과 집 안에 수시로 출몰하는 녀석이었고, 우리 닭들의 영양간식이므로 냉큼 잡았다. 날이 풀리고 습도가 오르자 벌레가 곳곳에서 출몰했다. 지네는 가장 독특한 녀석이었다. 큰 건 연필보다 굵고 길었다. 검정, 노랑, 주황이 어우러진 화려한 갑옷의 자태는 눈길을 사로잡았다. 녀석이 뾰족한 발을 차례로 구르며 마루에서 기어가는 소리를 들으면 소름이 돋았다. 무엇보다 독. 어릴 때부터 숱한 글과 말로 접한 지네의 독은 두려움과 호기심을 함께 일으켰다. 하지만 물린 적이 있던가.
몇 번 위기가 있긴 했다. 7~8년 전이었나. 밤에 불 끄고 누웠는데 막내가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아빠, 무슨 실 같은 게 얼굴 위를 지나갔어요.” 불을 켜보니 커다란 지네가 이불 위에 있었다. 3년 전엔 운전하다가 목덜미에 실오라기가 스치는 느낌이 나기에 쓸어내렸는데 허벅지 위로 툭 지네가 떨어졌다. 어찌나 놀랐던지. 그런데도 물린 적은 없었다.
그러다 이번에 당한 것이다. 수사망이 좁혀졌다. 녀석 말고 누구겠는가. 어느 블로그에 할머니가 들려준 말씀이 적혀 있었다. “지네에게 물리면 말이야, 호랑이한테 물린 것처럼 아프단다.” 40도 이상 뜨거운 물에 환부를 담그면 독이 중화된다는 글을 읽고 실행에 옮겼다.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통증은 물린 지 6시간이 지나면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12시간이 지나자 발가락에 빨간 점 두 개가 나타났는데, 그게 바로 지네에게 물린 전형적인 자국이었다. 시골에서 신발이나 장갑을 착용하다가 물린 사례가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지네라는 이름은 퍽 재밌다. 남도 사투리로 ‘길다’는 말이다. 한자로는 백족이고 영어로는 Centipede인데, 둘 다 백 개의 다리라는 뜻이다. 보는 눈은 여기나 저기나 닮게 마련인가.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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