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윤리가 겁박으로 해결될 일인가

한겨레 2024. 3. 1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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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의학과 서사 (83)
복지부 ‘의사 윤리 교육 강화’를 논한다
병원을 떠나는 전공의들을 묘사한 인공지능 그림. 윤리는 결코 지배 계층이나 권력의 뜻을 따름을 의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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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조선을 일제가 지배하고 있을 때, 독립운동은 국가의 법을 위배하는 행위였다. 물론 조선인은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민이므로 일제의 법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독립운동은 당시의 법을 위배할 때만 의미가 있다. 아니라면 누구로부터 독립한단 말인가? 일제의 법을 위배할 필요가 없는 운동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독립을 향한 열망을 표출하는 것이 되는가. 그렇다면 독립운동은 필연적으로 법과 질서를 벗어나야 한다. 흔히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을 비윤리적이라고 말한다면, 독립운동은 비윤리적인 일인가.

아니면 안중근 의사를 떠올려 보자. 그는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으며, 법정에서 일제의 조선 병합을 정당화하는 검사를 상대로 논쟁을 벌이며 이토의 통치를 부정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법을 어긴 자였고, 고래로부터 이어져 온 “살인하지 말라”는 확고한 도덕적 명령을 어긴 자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의 행동은 누군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살인이고 비윤리적인 행동인가.

한국 근대사의 여러 사건을 지적하며 사회 질서의 유지가 결코 윤리와 동의어가 아님을 주장하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예컨대 독립 이후 민주화 운동은 어떠한가. 아니면, 아예 제도화된 움직임을 생각해 본다. 과거사위원회나 인권위원회가 과거 사건을 재평가하는 일은 어떠한가. 이런 기관들은 기존 질서, 법적 결정, 다수의 사회적 평가를 뒤집고 과거의 결정이 잘못되었고 누군가를 복권하는 등의 결정을 내린다. 무엇이 그 배경이 되는가. 선과 옳음을 다시 따진다는 점에서, 이런 활동은 윤리를 근거로 한다.

윤리는 결코 지배 계층이나 권력의 뜻을 따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윤리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 다수의 요구와 반하는 행동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의료 영역에서 우리가 말하는 의료윤리는 이런 상황들을 많이 보여준다.

질서를 따르는 게 윤리는 아니다

의료윤리의 대표적인 사안으로 존엄사, 임신중절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연명의료 중단을 포함하여 존엄사 일반의 주장을 간략히 생각해 보면, 일반적으로 사회가 어떻게든 사람을 살릴 것을 의료계에 요구하고 그것을 내재화한 병원과 의료인이 환자의 뜻과는 무관하게 어떻게든 치료를 계속한다는 결정을 내릴 때, 환자가 더는 치료받고 싶지 않다고, 심지어 더는 삶을 연장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주장은 기술적 수단으로 연장할 수 있는 삶을 개인이 포기하는 것으로 비추어진다는 점에서, 더 오래 사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구현하고자 하는 사회 일반의 명령을 거스르는 선택을 개인이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연명의료 중단이나 존엄사는 의료윤리의 이름으로 사회 질서를 위반하는 개인의 선택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의료윤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연명의료 및 존엄사의 가부가 아니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허용한다면 어떤 방식의 실천으로 이를 끌어들일 것인지이다.

임신중절은 어떤가. 임신중절을 요구하던 여성들, 그리고 그들과 연대하던 이들은 여성의 선택권 또는 포괄적인 삶의 권리를 강조하면서 임신중절 행위를 법적으로도, 전통으로도 금지하던 사회에 반기를 드는 행위였다. 아직 논쟁이 있다고 해도, 임신중절이 찬반을 말할 수 있는 사안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임신중절 결정에 관한 공간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의료윤리이며, 마찬가지로 의료윤리는 임신중절을 하라 또는 하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어떤 상황이나 맥락에서 임신중절이 가능한지, 한다면 어떻게 해야 부모와 가족, 사회에게 좋을지를 검토하는 논증들을 펼친다.

여기, 어디에서도 의료윤리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권력의 말을 들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적이 없다. 의료윤리는 오히려 그 이름 아래에서, 각자의 권리를 어떻게 존중할 것인지를 살피며, 부정의한 의료 제도를 고치기 위해서 의료인들이 노력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3세기에 작성된 파피루스에 담긴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일부분. 출처: 위키미디어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진정한 뜻은

의료윤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이름은 히포크라테스일 것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보수, 진보 어느 쪽을 불문하고 때마다 소환되어 의료인들을 비판하는 데에 사용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모두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 자, 다음 중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위배되는 일은 무엇일까.

1. 의대 교수님의 자녀를 무전형으로 의과대학에 입학시키고, 이들에게 전액 장학금을 준다.

2. 임신중절이 법적으로 허용된 국가라고 해도 임신중절 시술을 한 의사를 처벌한다.

3. 의사의 독점을 강화하고 다른 직종은 의료 업무에서 완전히 배제한다.

4. 수술을 한다고 칼을 잡지 않는다.

1번? 아니면 3번? 아니다. 여기 제시된 모든 항목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위배하지 않음을 넘어,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의사들의 ‘윤리’로 강조하는 행위들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따르면 의사들은 자기 스승의 자녀들에게 다른 조건이나 보수 없이 의학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어떤 의사도 임신중절 행위를 해선 안 된다. 의사 바깥의 사람들에게 의학 지식을 전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금지된다. 수술하기 위해 칼을 드는 것은 당시 의사보다 낮은 지위에 있었던 외과의의 일이므로, 의사가 해선 안 된다.

이천 년도 더 전에 히포크라테스가 활동했으니, 그때 ‘윤리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과 맞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따라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도 모르나”라는 말을 하는 누군가에게 나는 묻는다. 내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정말 따라도 되냐고.

물론 의과대학 졸업식에서 낭독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이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지적은 맞다. 지금 우리가 ‘히포크라테스 선서’라고 하는 것은, 1948년 세계의사회가 제네바 회의에서 발표한 선언문이며, 따라서 엄밀히는 ‘제네바 선언’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리고 제네바 선언은 3절, 양심과 위엄에 따라 의업을 수행할 것과 4절,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할 것을 요청한다.

생각해 보자. 의사의 양심이란 무엇인가?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법을 따르는 것?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할 것은 무엇인가? 사회 제도가 아무리 엉망이더라도, 국가의 의료 제도가 환자의 건강을 악화시킬지라도 눈을 감고 내 앞에 있는 환자만 치료하면 된다는 것?

제도가 문제가 있을 때 눈을 감고 그냥 내 앞에 있는 일만 잘하는 것은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좋은 음식인데 맛없다고 안 먹겠다고 우는 아이에게 어쩔 줄 몰라 하며 초콜릿을 쥐어주는 부모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이것을 윤리의 이름으로 누군가가 나에게 강요한다면, 나는 그에게 당신은 윤리를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

제도가 문제가 있을 때 눈을 감고 그냥 내 앞에 있는 일만 잘하는 것은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일이 아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잘못된 제도가 초래한 문제들

나는 의대 증원이나 의사 증원도 가능하고 얼마든지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 현재 정부안은 의대 수준에서 심각한 교육의 질 하락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렵다고 본다). 또, 다른 의료 제도도 변경할 수 있고, 그것을 ‘의료 개혁’이라고 불러도 나는 문제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애초에 시민들과 환자들이 경험하던 문제들, 소위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지역의료 붕괴’를 만든 것은 국가다. 현행 제도를 설정하고 지금까지 유지해 온 것이 국가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의 의료 제도는 1950년대부터 중앙 집권의 방식을 계속 유지해 왔고, 국가와 복지부가 의료인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현재의 의료 제도,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과 오픈런을, 심지어 ‘3분 진료’를 허용하고 의료인이 그렇게 움직이도록 경제적 유인을 설정한 것은 국가였다. 이런 일들은 악의가 있었다기 보다, 다수에게 저렴한 진료를 제공하려다 보니 나타난 부작용이다. 따라서 이제서야 국가가 자기 잘못을 해결하겠다고 의료 개혁을 하는 것에 나는 아무런 반대 의견이 없다.

의사들이 그동안 아무런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당장 나만 해도 너무 슬프다. 계속 발표하고 연구하고 써 왔다. 나는 신진 연구자이고 교수니까, 얼마 되지 않았으니 사실 별로 원망할 일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한국 의료 체계의 문제를 연구하고 그 대안을 제시해 왔다. 의료 제도만 해도 미국식의 영리 의료를 한국에 적용할 가능성부터 사회주의 의료를 한국에 도입하는 논의까지 다양한 연구와 제언이 있었다. 이들 중 어느 쪽이 맞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많은 이들이 한국 의료가 최고이고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며 이런 논의를 일축해 왔음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지금의 문제는 그동안 누적되어 온 여러 사안이 터져 나오면서 벌어지고 있다. 예컨대, 지금까지 싸고 질 좋은 한국 의료를 지탱해 온 것이 미래의 약속으로 몇 년을 갈아 넣을 것을 강제당한 전공의와 전임의들의 희생이었다는 것이 인제야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현재 국가는 잘못을 의사 집단에 두고 이들의 문제를 고치기 위한 방식이 의료 개혁이라고 부르짖는다. 이에 반대하여 행동을 취하는 이들에게, 복지부는 윤리 교육을 강화하고 강제하겠다고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윤리 교육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국가 권력에 충실할 것? 선과 정의를 무시하고, 그저 다수의 명령을 따를 것? 초등학생에게도 요새는 그런 식의 이념 교육을 하지 않는다.

물론 의사 집단이 무조건 옳고, 전부 다 제대로 된 선택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와 의사의 분쟁 과정에서 의사 집단도 자기 한계를 표출했고, 의사 집단이라고 해서 모두가 정책에 밝고 현재의 문제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잘 파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복잡한 세계에서 의료 영역에 관한 단 하나의 답을 누군가가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오히려 나는 윤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 말한다. 우선해야 하는 것은 환자의 고통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의 정치적 견해나 이득을 내려놓고 진정한 의료 개혁을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국가도 힘자랑을 충분히 했고, 의사도 현재의 문제 상황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정말 ‘윤리’를 이야기할 거라면 겁박과 회피를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 필요한 것은 국가와 의사 모두 모여 환자의 고통 앞에서 대안을 검토하고 협의하는 자리이며, 그 자리를 나는 윤리라고 부른다.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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