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 축소사회와 그 적(敵)들
불특정 다수에게 불편한 쓴소리를 하는 데 칼 포퍼(Karl R. Popper)만한 핑계거리가 없다. 칼 포퍼는 반증주의를 통해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실만을 가치있게 보는 귀납적 합의주의를 비판했다. 합리적 무결성을 주장하는 논리실증주의에 따르면 수많은 오류, 모순, 부조리는 무지의 영역으로 남기 때문이다. '인간은 실수를 통해서 진보한다'는 말은 반증주의 철학을 대변한다. 칼 포퍼는 가설과 반박을 통해 실수를 보완하는 것이 비합리적 인간을 진보시켜 온 유일한 요인이라고 주장했다.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인한 폭력의 세기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란 논쟁적인 저서를 통해 무지하고 모순적인 다수를 과감하게 '적(敵)'이라고 비판했다. 열린 사회란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그래서 오류수정과 진보가 가능한 사회다. 열린 사회의 적은 당연히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 '닫힌 사회'다. 그러나, 열린 사회의 적이 전체주의에만 국한한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전체주의는 자신만이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도자의 독선과 오만이 그를 지지하는 대중의 무지와 결합한 정치 체제일 뿐이다. 열린 사회의 적은 비판을 수용하지 않으며,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비합리적이고 무지한 닫힌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다.
칼 포퍼는 닫힌 사회의 문제가 외부자에 의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는데 우리 사회가 직면한 축소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2023년 합계출산율이 발표된 직후 유수의 해외언론이 비관적 전망보다 비관적인 한국의 인구문제를 '국가위기'라고 보도했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감소가 단기간에 해결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이고 복지, 교육, 의료, 지역, 산업, 경제, 국방 등 축소 구조조정과 연계될 것이기 때문이다. 2023년 국회예산정책처의 저출산 보고서는 더더욱 놀랍다. 2006년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이 제정된 이후 2023년까지 18년간 무려 380조 원이 저출산 대응예산으로 지출됐다. 지출규모로 보면 '위기예산'이 분명하다.
그러나 2006년 1.13명이었던 합계출산율이 2024년 0.72명으로 급락했으니 정책은 실패했고, 천문학적인 예산은 무용지물이 됐다. 전체주의를 비판했던 칼 포퍼를 소환해야 하는 것은 비판을 수용하지 않으며,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불특정한 우리 사회의 모두가 '축소사회의 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축소사회의 적은 아직도 '확장사회'를 꿈꾸는 개발론자 모두다. '한강의 기적'은 한국이 성취한 근대화의 신화로 비판 없이 회자돼 왔다. 1960년 79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2023년 약 3만 3000달러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그러나 경제성장은 수도권의 확장과 지방의 축소라는 불균형을 수반했다. 1960년 250만 명이던 서울 인구는 약 1000만 명으로 증가했고, 수도권의 인구비중도 20.8%에서 51%로 확장됐다. 한강의 기적은 서울과 수도권을 확장시켰지만 비수도권 지역을 상대적으로 축소시켰다. 농촌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새마을 운동'의 신화가 무비판적으로 기억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농림어업 취업자 비중은 2007년 7.2%에서 2019-2021년까지 5.3%로, GDP 비중도 2.3%에서 1.7%로 축소됐다. 농업종사자 중 39세 이하 청년비중은 1.7%에 불과하다. 새마을 운동이 성공했다면 농촌위기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인란 말인가!
확장사회의 신화에 매몰된 정책오류도 반복되고 있다. 젠더평등, 청년, 출산, 육아, 교육, 고용, 이민 등 지속가능한 조정을 위한 정책과제가 산적해 있다. 그런데 선거 때마다 축소사회의 위기를 망각하고 표심을 자극하는 확장의 정치가 난발되고 있다. 2023년 말 여야합의로 통과된 '1기신도시특별법'도 그중의 하나다. 이 법은 30년 밖에 되지 않은 아파트의 용적률을 최대 500%로 상향해 재개발하도록 했다. 산술적으로 용적률이 200% 내외인 수도권의 200만 가구는 최대 500만 가구로 증가할 것이다. 역시 산술적으로만 보면 전국평균(0.78)보다 출산율이 낮은 서울(0.59), 인천(0.74)과 경기(0.83)가 '축소사회의 지옥'될 수도 있다. 과반수 인구, 과반수 의원, 과반수 경제가 지배하는 정치에게 축소사회의 지속가능한 조정을 바랄 수도 없다.
20년간 천문학적 예산을 쏟아 부은 정책실패로부터 우리 사회가 배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개발의 신화는 계속되고, 불안을 양산하는 확장공약이 난발하지만, 축소사회의 위기는 정치가 되지 못했다. 학문적인 무지도 축소사회의 중요한 적이다. 지방대학의 기초학문이 소멸하고 있는 가운데 수도권의 연구중심 대학은 축소사회의 위기와는 무관한 '수도권의 상아탑'이 됐다. 축소사회의 위기는 이미 구조화됐다. 다만 최악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이 남아있을 뿐이다. 윤대엽 대전대학교 군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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