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선 도전하는 트럼프가 ‘나토’를 다시 흔드는 까닭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2024. 3. 13.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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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경선 도중에 나온 트럼프의 나토 관련 발언이 유럽과 워싱턴 정가를 강타하고 있다.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한 발언이라거나 방위비 분담금을 늘리기 위한 협상용이라는 시각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월10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콘웨이에 있는 코스탈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AFP PHOTO

2018년 7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공식 연설에 앞서 존 볼턴 안보보좌관을 급히 불렀다. 그는 “이 자리에서 미국의 나토 탈퇴라는 역사적 순간을 만들어볼까 하는데?”라고 볼턴에게 말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깜짝 놀란 볼턴은 “절대 선을 넘어선 안 된다”라며 만류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최근 볼턴이 〈워싱턴포스트〉에 전한 일화다. 볼턴은 “트럼프가 올가을 대선에서 재선되면 나토를 궤멸시키기 위한 방안을 찾으려 할 것이다. 트럼프는 나토에서 철수하려는 욕망을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라고 밝혔다.

트럼프의 나토 철수 위협이 유럽과 워싱턴 정가를 강타하고 있다. 집권 시절 줄곧 나토를 못마땅해하며 철수를 거론하던 그가 유세 도중 또다시 으름장을 놓았다. 발언 수위가 심상치 않다. 2월10일 사우스캐롤라이나 대선 경선 유세 현장에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원조 문제를 얘기하다가 충격적 일화를 소개했다. 재임 시절 나토의 한 회원국 대통령으로부터 “우리나라가 돈을 내지 않으면, 러시아 침략을 받았을 때 미국이 보호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고, 이에 대해 “돈을 내지 않으면 체납국이니 보호받지 못할 테고, 러시아에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겠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이 발언에 대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나토 회원국이 공격받으면 미국이 군사 대응에 나서리라는 것은 전 세계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트럼프의 발언은 극도로 위험한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나토 헌장 제5조는 나토 회원국이 공격받으면 나머지 회원국이 자동으로 군사개입을 하도록 명문화하고 있다.

직접 당사자인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은 전전긍긍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가뜩이나 불안한 상황에서 러시아 침공을 유도하는 듯한 발언이 재선 가능성이 높은 트럼프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최근 독일 뮌헨에서 열린 안보회의에서 나토 회원국들은 이구동성으로 트럼프를 성토했다. 하지만 별다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이례적으로 성명을 통해 “트럼프의 발언은 미국과 유럽을 약화시키고 미군과 유럽 군대를 더욱 위험에 처하게 만들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나토는 냉전 시절 소련의 팽창에 맞서 1949년 4월 미국 주도로 창설된 유럽의 집단 안보기구이다. 처음에는 12개국이었는데,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도 확대·재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1999년에는 폴란드·체코·헝가리 등 옛 소련의 바르샤바 동맹 회원국까지 가입시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엔 오랜 중립국이던 핀란드와 스웨덴도 나토에 가입했다. 현재 회원국은 31개국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안보동맹으로 자리 잡는 데에, 첨단무기와 핵우산을 제공한 미국이 큰 기여를 했다.

그런데 트럼프는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나토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툭하면 ‘나토 철수’를 거론했다. 그가 나토 무용론, 철수 카드를 들고나오는 이유는 하나, 돈 때문이다. 나토 회원국들이 미국이 기대한 만큼 충분히 국방비 지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토가 냉전을 거치며 유럽 안보의 주춧돌 구실을 하고 있는데, 회원국들은 미국의 국방비에 의존하며 ‘무임승차’를 해왔다는 게 트럼프의 인식이다. 트럼프의 이런 인식은 하루아침에 나온 게 아니다. 부동산 개발업자 시절이던 1987년, 그는 CNN에 출연해 “미국이 나토 방위를 위해 지불하는 돈에 비하면 회원국들의 국방비 지출은 기가 막힐 정도로 불균형적이다”라고 말했다. 2015년에는 “냉전시대의 쓸모없는 유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2016년 11월 대선에서 승리하자 나토 회원국들은 잔뜩 긴장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우크라이나 영토) 강제 합병으로 회원국들의 위기감이 큰 상황이었다. 트럼프는 대통령 취임 4개월 뒤인 2017년 4월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을 만나 “더는 나토를 ‘냉전시대의 쓸모없는 유물’이라 부르지 않겠다”라고 말해 태도 변화를 보인 듯했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당시 트럼프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 이후에도 나토 회원국들이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수입해 러시아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며 불평했고, 회원국들의 국방비 지출이 적다며 미국에 ‘빚지고 있다’는 불만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체납국’이라는 황당한 표현은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다.

2월26일 폴란드에서 열린 나토 군사훈련. ⓒREUTERS

‘2% 국방비’는 의무 사항이 아닌데…

많은 전문가들이 트럼프의 잘못된 인식을 지적한다. 2006년 나토 회원국들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를 2024년까지 2%로 늘리자고 합의한 바 있다. 합의 이행이 지지부진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합병 이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 등 회원국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지난해 말까지 31개 회원국 중 목표를 달성한 나라는 11개국. 올해는 7개국이 더 목표를 달성할 예정이다. 나토 회원국 중에서 국방비 지출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폴란드다. GDP의 3.9%(240억 달러)를 국방비로 지출한다. 러시아 접경국인 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라트비아 등 발트 3국도 2% 기준을 채웠다(미국은 약 3.5%로 지난해 국방비로 8700억 달러를 지출했다). 그런데 이 2% 국방비는 나토 회원국들의 자율 결정 사항이지 트럼프의 주장처럼 의무 사항이 아니다. 하지만 ‘무임승차’ 인식을 가진 트럼프에게 이런 주장은 통하지 않는 것 같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트럼프는 집권 말기인 2019년 미국의 나토 철수 문제를 외교안보팀과 논의하면서 나토 회원국이 국방비를 훨씬 더 많이 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인물이 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국방장관 대행을 지낸 크리스토퍼 밀러다. 트럼프와 가까운 그는 국방부 개편 기획안에서 “유럽 주둔 미군을 감축하고 나토 회원국들이 재래식 병력 대부분을 맡는 식으로 나토를 재편해야 한다”라고 제안한 바 있다. 트럼프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에 독일 주둔 미군 3만5000여 명을 포함해 약 8만5000명에 달하는 유럽 주둔 미군 중 상당수가 철수할 것이다. 그에 따른 안보 공백과 혼란이 불가피하다.

다만 일부에선 트럼프의 철수 위협이 동맹을 압박해 더 많은 국방비를 내게 하려는 협상용이라는 시각도 있다. 재임 시절에 자신이 윽박질러 나토 회원국들이 분담금 수백억 달러를 더 냈다는 점을 참모들에게 떠벌렸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밋 롬니 공화당 상원의원은 AP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위협적 발언은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일 뿐이다. 실제 그럴 의사는 없을 것이다”라고 평가절하했다. 지난해 의회가 상원의원 3분의 2 이상 동의 없이는 타국과의 조약에서 미국이 탈퇴하지 못하도록 한 법안을 통과시킨 것도 트럼프의 일방적 나토 철군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힌다.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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