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결! 애니메이션-2조엔 시장에서 살아남기 “하얗게 불태웠어”[시네프리뷰]
2024. 3. 13. 06:06
영화에는 일본 특유의 피학대 정서가 깔려 있다. 전근대 소농사회 때부터 밑바닥에서 형성돼 내려온 순응 멘탈리티다. 한국의 동종업계에도 저런 식의 정당화-순응 논리가 통할까. 그럴 리 없다.
‘하얗게 불태웠다’, 영화를 보며 내내 떠올렸던 것은 인터넷 ‘짤방’으로 유명한 만화 <내일의 죠>(치바 테츠야 작·1968~1973·일본 주간소년매거진 연재)의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가 시작한 지 17분이 지나서야 “일본의 애니메이션 시장은 2조엔 규모이며 분기마다 50편의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제목이 나온다. TV 애니메이션을 볼 때 기억하는 것은 감독이나 주제곡, 조금 더 나아가면 참여한 성우 정도겠지만 제작은 수많은 역할을 나눠 가진 이들이 참여하는 협업 과정이다.
갑이 아닌 을인 감독·프로듀서
영화의 주인공은 신인 여성 감독 사이토 히토미다. 국립대를 나와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때려치우고 애니메이션 제작 업계로 들어온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면접시험에서 왜 애니메이션 연출을 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은 그는 천재 감독으로 추앙받는 오우지 치하루의 작품을 뛰어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그 후 7년. 마침내 히토미 감독은 <사운드백: 카네다의 돌>이라는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메인 감독으로 정식 입봉한다. 예정 방영시간은 황금시간대인 토요일 오후 5시. 그런데 같은 시간, 다른 채널에 경쟁작품이 있다. 천재 오우지 감독의 복귀작 <운명전선 리델라이트>이다(참고로 오우지의 한자표기는 왕자(王子)다. 별다른 탈이 없는 한 천재 오우지 감독이 패권을 차지하는 것은 예정돼 있다는 암시다).
제작발표회장에서 히토미 감독은 애니 업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오우지 감독과 나란히 앉아 자신이 이기겠노라고 선언한다. 방영 첫 회 두 경쟁작품의 시청률은 거의 동률이었지만 회차를 거듭해가며 오우지 감독의 작품이 앞서 나간다. 과연 히토미 감독은 전세를 뒤집어 패권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히토미 감독과 오우지 작품의 여성 제작자 아리시나 카야코를 주인공으로 삼아 각자의 상황을 교차 편집해 보여주는 식으로 진행한다. 매주 마감 시한에 맞춰 일정한 수준 이상의 작품을 뽑아내야 하는 협업 과정은 피 말리는 전쟁이다. 촬영감독은 감독이 요구하는 바를 숫자로 말해 달라고 하고, 적화 감독은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고 열정”이라고 말한다. 색채담당은 그냥 “좀더 파랗게”가 아니라 구체적인 색이름을 말해 달라고 한다. “그러니까 원하는 건 코발트블루야, 아니면 세룰리안 또는 이지언이야?”
애먹는 것은 상대편, 오우지 감독의 <운명전선…> 쪽도 마찬가지다. 7년 만의 복귀작을 찍는 감독은 제작발표회 당일까지 행방불명이다.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든 감독은 다 엎어버렸다. 결국 아리시나 프로듀서는 애니메이터 회사를 찾아가 고개를 숙이며 무리한 부탁을 해야 했다. 철야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먹밥을 만들어 먹이며 애원한다.
교차 편집된 두 여성 감독/프로듀서의 ‘사정’은 대비된 환경이면서도 공통적이다. 얼핏, 갑의 위치에 있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알고 보면 을이다. 히토미는 작품의 질과 상관없어 보이는 피겨회의, 패션 화보 촬영장에 끌려다닌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영화의 핵심대사 “뭐든지, 다 줄게”를 사용한 컵라면 CF를 본 히토미는 폭발한다. 그나마 히토미는 대기업 제작사 ‘토우케이’ 소속이라 낫다(이 대형 애니메이션 제작사 토우케이는 누가 봐도 실제 영화의 제작사인 토우에이에서 따왔다).
작은 규모의 독립제작사 프로듀서인 아리시나는 “마지막 화에서는 주인공들을 죽이는 거로 끝내겠다”고 고집 피우는 감독과 A부터 Z까지 수익만 따지는 제작위원회 사이에서 상상 초월한 압박을 견뎌야 한다(이 제작위원회 회의 장면은 아리시나를 가운데 세워놓고 빙 둘러앉는 형태인데, 누가 봐도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비밀결사 ‘제레’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관통하는 일본 특유의 피학대 정서
보다 보면 영화뿐 아니라 여기저기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일본 특유의 피학대 정서가 바탕에 깔려 있다. 관객몰이용 성우로 기용된 인기 아이돌은 “내가 관객 유치용 성우라는 것은 잘 알아요. 그렇다면 국내 제일의 관객 유치용 성우가 되겠습니다”라고 다짐한다.
끝없이 감독을 바깥으로 돌리며 착취하는 것처럼 보이는 프로듀서를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은근히 비난하자 감독은 “내가 프로듀서의 먹잇감이라면, 당신들도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을 만들어주세요. 적어도 프로듀서는 확실히 먹을 수 있게 해주잖아요!”라고 소리 지른다.
아마도 전근대 소농사회 때부터 밑바닥에서 형성돼 내려온 순응 멘탈리티(사고방식)다. 한국의 동종업계, 그러니까 애니메이션 제작업계도 저런 식의 정당화-순응 논리가 통할까. 그럴 리 없다. 재미있는 부분이다.
제목: 대결! 애니메이션(ANIME SUPREMACY!)
제작연도: 2024
제작국: 일본
상영시간: 129분
장르: 드라마
감독: 요시노 코헤이
출연: 요시오카 리호, 나카무라 토모야, 에모토 타스쿠, 오노 마치코 외
개봉: 2024년 3월 6일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수입/공동배급: ㈜블루라벨픽쳐스
작품 대결에서 승리해 ‘패권’을 차지한다는 것의 의미
매 분기 50편이 제작돼 경쟁한다는 건 경쟁에 참여한 처지에서 보면 엄청난 압박이다. 지상파뿐 아니라 애니전문 케이블·위성 채널들의 방영시간대까지 꽉꽉 채운다고 해도 50여 편의 작품을 다 소화할 수 있을까. 방영이 결정됐다면 이제는 시간대를 놓고 경쟁할 수밖에 없다. 그 부분은 요즘 한국의 애니메이션 채널도 마찬가지인데 새벽 1~2시 심야시간대에 방영시간이 배정됐다면 이미 시청률 경쟁에서 낙오된 것이다.
영화 자막에는 분기로 번역됐지만, 원래의 대사는 ‘1쿨(クール)’이라는 일본 방송용어다. ‘쿨’이란 일본어화된 프랑스어(cours·프랑스에서는 이런 표현을 안 쓴다)로 1년을 3개월 단위로 쪼갠다. 보통 4분의 1분기 식으로 나누니 번역어로는 분기라고 하는 것이 매끄럽긴 하다. 1년이 52주이므로 4로 나누면 주간 단위로 방영되는 드라마/애니의 ‘1쿨’ 분량은 최대가 13회차다. 보통 1~3주의 휴방을 고려하면 9화에서 12화 정도로 끝나는 식이다.
영화의 원제는 하켄 아니메!(ハケンアニメ!), 그러니까 ‘패권 아니메!’다. 츠지무라 미츠키의 동명 원작 소설을 실사 영화화한 것이다. 패권이란 이거다. 50여 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팔려 시장을 제패한 작품을 말한다. 예컨대 관련 통계자료를 보니 지난해를 통틀어 가장 잘 팔린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최애의 아이>(推しの子)였는데 이 애니메이션은 2쿨, 그러니까 4월부터 6월까지 방영된 작품 중 패권을 차지한 작품이었다. 오타쿠가 아닌 일반 시청자의 관점에서 지난해 히트한 작품이 뭐가 더 있었더라, 하고 떠올려보면 <스파이 패밀리> 2기 정도? 결국 ‘패권’을 차지하지 못한 작품들 역시 수많은 사람의 땀과 열정, 노력을 쏟아부었건만 주목받지 못하고 잊히는 셈이다.
영화 속 애니메이션 <사운드백: 카네다의 돌>을 감독한 신인 감독 히토미는 “오우지 감독이 자신의 작품에 영혼을 갈아 넣는다면 저 같은 사람은 영혼도, 몸도, 수면시간도 갈아 넣을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한다. 감독 데뷔 작품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다시는 감독을 맡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절박감이다. 결국 비정한 경쟁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인데, 그는 살아남게 될까. 그건 앞으로 영화를 볼 사람들을 위해 아껴두자.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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