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인플레는 세금이다
고물가에 실질 근로 소득 감소
한은법 1조 1항은 ‘물가 안정’
과일값 인플레 기대 흔들 우려
공급까지 감안한 물가정책펴야
그제 김은혜 국민의힘 경기 성남분당을 총선 후보가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와 만나 “기준금리 인하를 제안했다”고 적었다. 김 후보는 건설 경기가 어렵고 금리가 높아 은행 대출이 어렵다고 썼다. 공사비 상승에 분당을 포함한 1기 신도시 재건축 분담금이 늘었다는 점도 빼놓지 않았다. 이 총재는 “통화 신용 정책을 통해 나라 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한은에 주어진 의무”라고 답했다고 한다. 금리 인하를 생각해보겠다는 뜻인지 원론적인 입장만 되풀이한 것인지 알쏭달쏭하다.
미국이라면 어땠을까.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주식시장 버블론이나 주택시장 침체와 관련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금리를 결정하는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일 뿐 연준은 증시나 주택시장만 바라보지 않는다”고 해왔다. 최소한 겉으로는 뚜렷이 선을 긋는다.
이유는 명확하다. 물가다. 코로나19 뒤인 2022년 파월 의장은 “인플레이션에 대해 얼마나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이제야 알았다”는 반성문을 썼다. 그 뒤로 파월은 신중해졌고 또 겸손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김 후보가 전한 이 총재의 발언은 아쉽다. 한은법 1조 1항은 ‘(한은은) 물가 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국민 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한다’고 돼 있다. 연준은 물가와 고용 안정이 동등한 목표지만 한국은 물가를 중심으로 금융 안정에 유의해야 할 뿐이다. 특히 지금은 금융 안정을 논할 때가 아니다. 한은 총재가 왜 선거를 앞두고 전직 대통령실 홍보수석과 만나 금리 얘기를 했는지부터 의문이지만 결과적으로 한은이 물가 안정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물론 한은의 기조를 SNS상의 짧은 대화로 재단하기는 어렵다. 김 후보가 누락한 대목이나 이 총재가 실수로 빠뜨린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1주일 전, 2월 소비자물가지수에 대한 한은의 논평을 보면 이런 생각이 과하지 않다는 느낌이다. 과일 값이 40% 넘게 폭등하면서 물가가 3.1%를 기록한 날, 한은은 “예상에 부합하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물가 둔화 흐름은 매끄럽기보다 울퉁불퉁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햇과일이 나올 때까지 과일 값 강세는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농림축산식품부 장관도 황당하지만 한은 역시 1개에 5000원인 사과에 시름하는 서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립서비스에 가깝지만 파월 의장은 한동안 기자 간담회 때마다 “인플레이션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인플레이션은 세금이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보이지 않게 부과된다. 지난해 4분기 도시 근로자 가구의 실질소득은 고물가에 전년 대비 1.9% 쪼그라들었다. 인플레이션은 노동자의 소득 감소를 불러오고 사회 불안으로 번질 수 있다. 쉽게 볼 부분이 아니다.
한은도 억울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사과 같은 공급발 인플레이션은 중앙은행의 직접 대응 카드가 없다. 농산물과 유가는 원래 변동성이 크다는 판단도 가능하다. 그러나 파월 의장이 고백했듯 물가라는 게 간단하지 않다. 첫 번째,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에서 좋지 않은 신호가 내려가던 물가가 다시 튀어 오르는 일이다. 두 번째, 인플레이션 기대다. 국민들이 높은 농산물 가격이 계속된다고 느끼면 물가 관리는 사실상 끝이다. 세 번째, 국제유가다. 월가에서도 예측하기 어려워 하는 것이 환율과 유가다. 네 번째, 돈 풀기의 역습이다. 지난해 12월 광의통화량(M2)은 3925조 4000억 원으로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12월과 비교해 약 34.6% 폭증했다. 사회간접자본(SOC) 사업만 해도 상반기에만 전체 예산의 65%를 풀기로 했다.
한은은 공급 부족까지 감안해야 한다. 두 나라의 경제 상황이 다르지만 한은의 실질 정책금리는 0.4%, 미국은 2.4%다. 한은의 외국인 돌봄 근로자에 대한 최저임금 차등 적용 제안은 파격적이면서 시의적절하지만 남은 과제가 한은에 많다. 미 클리블랜드 연방준비은행처럼 국민들이 다음 달 물가지수 전망치를 미리 볼 수 있는 시스템부터 만들었으면 좋겠다. 한은이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의 면모를 더 드러냈으면 한다. 경제 부총리와 한은 총재는 그 역할이 다르다.
김영필 기자 susopa@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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