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이제부턴 빼기

차경애 전 KBS 아나운서 2024. 3. 1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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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애 전 KBS 아나운서

지금까지의 삶은 더하기였다. 우유를 사도 하나 더, 노트를 사도 하나 더. 혹시 부족하면 사러 갈 시간이 없으니까 항상 하나 더 사 두었다. 온라인 구매가 없던 시절이라 물건을 사려면 직접 마트에 가야 하는데 직장에 다니면서 가사와 양육은 시간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시간이 있을 때 하나 더 사놓아야 했다. ‘1+1’은 무조건 장바구니에 담았고 무엇이든 여유 있게 사고 채워두었다. 아이가 갑자기 우유를 찾는데, 갑자기 색종이를 찾는 데 없으면 안 되니까 항상 많이 쌓아두고 살았다. 그래서 냉장고는 계속 채워져 갔고 공간이 부족하니 냉동고가 필요했고 냉동고도 하나로는 안 되어 하나 더 구입해야 했다. ‘엄마 이거 있어?’하면 바로 ‘여기’하고 주어야 안심이 됐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이 독립해 집을 떠나면서 남겨진 많은 물건들. 지금은 틀렸지만 그땐 그게 맞았다.

옷장 문을 열었다. 10년이 훌쩍 넘은 옷 들이다. 몇 년 전부터 난 옷을 사지 않는다. 아나운서라고 하면 옷이 상당히 많은 줄 아는데 방송할 때마다 다른 옷을 입고 나오니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방송할 동안만 잠시 협찬받아 빌려 입는 옷들이며 마음껏 비싼 옷을 입어봐서 그런지 다행히 옷 욕심은 없다. 유행을 타지 않는 정장은 브로치나 스카프로 변화를 주면 되고 계절별로 정장 한두 벌, 평상복 몇 벌만 있으면 될 것 같다. 비싼 거라서, 기념되는 거라서, 언젠가 쓸 것 같아서 버리지 못하는 물건들. 지금 안 쓰면, 지금 필요 없으면 그 공간에서 빼자. 나는 집 정리를 위해, 아니 집에서 짐을 빼기 위해 정리수납 과정 수업을 듣기도 했다. 잡다한 것으로 주변이 채워지면 선택할 것이 너무 많아져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그래서 요즘은 물건을 살 때 꼭 필요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우연히 굿윌스토어를 알게 되었다. 옷 신발 주방용품 등을 기부하는데 중고 물건이라도 손질해 보내면 재판매돼 구매자는 싸게 구입해서 좋고 나는 기부해서 좋고 또 판매가 많이 되면 장애인의 일자리가 늘어나서 좋은 일석삼조의 일에 동참하고 있다. 기부한다고 생각하면 기분도 좋아지고 집 공간도 넓어지니 참 좋다.

관계도 빼기 시작했다. 만나면 좋은 사람도 있지만 불편한 사람도 있다. 모임도 줄이자. 사람도 줄이자. 나이 들수록 사람을 많이 사귀고 모임을 만들어 나가라고 하는데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진짜 힘들 때 내 얘기를 들어주고 눈물을 닦아줄 사람 한두 명이면 된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나 자신과 가족이고 가장 중요한 관계는 자신과의 관계이며 가족관계이다.

그런데 빼기가 더하기보다 더 어렵다. 신문에 쓰는 이 글도, 쓰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다 쓰고 나면 10장을 훌쩍 넘긴다. 그러나 신문사에서 요구하는 분량이 있기 때문에 글을 줄여야 하는 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걸 빼야 하나 저걸 빼야 하나 너무 아깝고 힘든 작업이다.

글을 읽는 속도가 느려졌다. 작은 글씨를 오래 보면 눈이 아파, 밤새워 읽던 소설도 이젠 못 읽겠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글의 분량을 줄인 동화책과 시를 읽는 것이다. 글이 적어도 글이 없어도 괜찮다. 이순구의 웃는 얼굴은 그림까지 좋다. 최민식의 사진집은 사진 하나하나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전하며 감동을 주는지 모르겠다. 시는 소리 내어 낭송도 해본다. 김남조 시인의 시 ‘내야 흙이온데 밀랍이듯 불 켜시고 한 평생 돌이 온걸 옥의 문양 그으시니….’ 내야 흙이온데 내야 흙이온데, 이 몇 글자만 되뇌어도 가슴이 울컥한다.


지금까지 너무 뜨겁게 살았다. 더하기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아나운서 일도, 집안일도 모두 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40대 중반에 번아웃이 오고 몸도 마음도 다 타버려 재가 된 적도 있다. 아름답게 늙어 가는 것이 아름답게 죽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는데 이젠 뜨거운 것이 어울리지 않은 나이가 됐다. 모든 면에서 온도가 떨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고 신체와 인지능력이 저하되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내 삶에서 말년이 가장 행복하기 위해 비워야 한다. 덜어내자. 가볍게 천천히 가자. 이제부턴 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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