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세계 최강 ‘금소법’도 못 막은 ELS 사태
수수료 목매게 만드는 은행원 ‘성과평가’ 수술해야
요즘 은행에 가서 펀드나 ELS(주가연계증권) 상품에 투자하려면 1시간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온갖 서류에 서명하고, “상품 설명을 듣고 이해했다”는 문구를 친필로 쓰고, 구두로 녹취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투자 절차가 한층 까다로워진 것은 2021년 ‘금융소비자보호법’(이하 금소법) 시행 이후부터다. 2019년 외국 금리 연계 파생상품(DLF) 사태, 2020년 라임·옵티머스 사건 이후 금융회사의 고위험 상품 판매에 제동을 걸기 위해 금소법이 제정됐다.
금소법은 소비자 피해를 막기 위해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우선 금융회사가 금융상품을 판매할 때 적합성, 적정성을 지켜야 한다. ‘적합성’은 투자자의 재산 상황, 투자 경험 등에 비추어 부적합한 금융상품 추천을 금지하는 것이다. ‘적정성’은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투자하려는 금융상품이 소비자의 재산 등에 비추어 부적정할 경우 그 사실을 투자자에게 고지하고 확인하라는 것이다. 이 두 잣대만 들이대도 홍콩H지수 ELS를 19조원어치나 팔아치운 은행들이 상품 판매의 정당성을 설명하기가 난감할 것이다.
더 무서운 칼도 구비돼 있다. 금융회사가 상품 설명을 제대로 안 하고, 부당한 권유를 하면 수입의 50%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 설명 의무와 관련한 과실 여부를 피해자가 아니라 금융사가 입증해야 한다. 은행이 자필 서명과 녹취에 목을 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금소법은 금융사의 불완전 판매가 드러나면 몇 년 뒤에라도 투자자가 ‘계약 해지권’을 갖도록 했다. 은행, 증권사가 고위험, 고난도 투자상품 판매 후 문제가 생기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면하기 어렵게 만든 것이 금소법이다. 가히 세계 최강 소비자 보호법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도 은행들이 고위험 홍콩H지수 ELS를 금소법 시행 후 무려 19조원어치나 팔아치웠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은행원에겐 금소법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 은행원들의 업무 성과를 측정하는 지표인 KPI(Key Performance Indicator)가 그것이다. KPI 점수가 높아야 승진도 하고 보너스도 두둑이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영업점 창구에선 예금보다 ELS를 팔아야 KPI 점수를 더 높게 받는다. 금융 당국의 실태 조사 결과, A은행의 경우 KPI에서 1000점 만점에 410점이 고위험 상품 판매 실적과 관련한 배점인 것으로 드러났다.
위험한 상품을 걸러내라고 만든 은행 상품위원회는 실적에 목매는 영업 부문 대표의 목소리에 눌려 제 구실을 못한다. KPI는 이런 구조에서 판매가 결정된 상품을 많이 팔라고 재촉하는 구조로 배점이 짜여 있다. 그러니 은행원들은 은행에 더 많은 수수료를 안겨주는 고위험 상품 판매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은행원 입장에선 고위험 상품을 많이 팔수록 자기에게도 이익이다. 나중에 문제가 되면 은행이 손실금을 물어주니 은행원의 ‘도덕적 해이’가 만개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과거 고위험 상품 판매와 관련한 금융사고가 터질 때마다 고위험 상품 판매를 부추기는 KPI의 문제점이 지적됐지만,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은행이 무분별하게 고위험 상품을 팔고, 대규모 손실이 나면 정부가 은행 팔을 비틀어 보상하는 것은 세계 10위 경제 대국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후진적 방식이다.
KPI 가산점을 투자 고객이 이익이 날 때만 부여하고, 권유 상품으로 고객이 손실을 볼 경우 과거 받았던 보너스를 토해내게 하는 제도(claw back)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은행원이 고객에게 투자를 권할 때 자기 돈 투자하는 것처럼 신중해지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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