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의 묵언]박용진을 위하여
박용진 의원이 끝내 낙천했다. 민주당의 ‘비명횡사’라는 기이한 공천 학살극이 어림 끝났나보다. 김부겸 상임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이를 시인하고 사과했다. “투명성, 공정성, 국민 눈높이라는 공천 원칙이 잘 지켜졌는가에 대해서 많은 국민들께서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여론의 뭇매에도 ‘공천 혁명’이라 항변했던 이재명 대표와 임혁백 공천관리위원장도 이제 그만 솔직해져야 한다. 유감이라도 표했으면 좋겠다.
낙천자들은 독설을 퍼붓고, 탈당을 하고, 당적을 바꿨다. 고용노동부 장관을 지낸 국회부의장은 민주당을 버리고 국민의힘으로 옮겨 총선에 출마했다. 25년 넘게 자신을 품어준 둥지를 박차고 나가 불과 보름 만에 빨간 옷으로 갈아입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또 급했으면 그랬을까. 하지만 이번 총선 승패와 관계없이 그의 정치인생은 냉혹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나중에는 그것이 더 억울할 것이다.
낙천자들은 분노, 배신, 무력감에 하늘이 무너졌을 것이다. 특히 민주화운동을 했던 의원들은 한때 동지였던 동료가 자신을 내치는 데 앞장서거나 방관하는 것을 보며 뼈가 저렸을 것이다. 자신이 주인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보니 객이었다. 온갖 풍상을 겪으며 지켜온 민주당인데 굴러온 돌들에 쫓겨났다. 일찍 몸을 일으켜야 했는데 이미 해가 지고 있다. 그들에게는 생애 가장 굴욕적인 시간이 주어졌다. 그들은 시나브로 잊힐 것이다. 정치인에게는 잊힘이 가장 무섭다. 그래서 진퇴를 두고 번민을 거듭했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쩌다 시대의 모서리에 서있게 되었는가.’ 그러다 골짜기에 버려진 자신을 발견하고 가슴을 쳤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도 그랬다. 정조는 다산을 곁에 두며 총애했다. 화성을 축조한 실학자, 빼어난 관료, 왕이 신뢰하는 암행어사가 되어 한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하지만 새 임금이 들어서자 권력은 순식간에 증발했다. 조정은 굴러온 돌들의 세상이었다. 몇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귀양을 갔다. 다산은 무수히 절망하고 흔들렸다. 쥐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놓고 보니 권력은 무서웠다.
“길고 고달픈 18년 남도유배의 시작이다. 삭풍이 몰아치는 39세, 그의 겨울이 어떠했으리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울분과 좌절의 나날들, 사람들은 귀양 온 천주교도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때 다산은 강진에서의 첫날밤을 묵기 위해 동문 밖 작은 주막(동문매반가)을 찾아간다. 주모가 골방 하나를 내어주고 밥상을 차려준다. 그 절대고독 속에서 주모의 손길은 따뜻했다. (…) 얼마나 통음을 하였을까, 목숨을 끊어버릴 것까지 생각했던 다산은 담배를 많이 피웠다고 한다. 그렇게 허송세월을 할 때, 늙은 주모의 한마디가 떨어지니 ‘어찌 헛되이 그냥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낮으나 깊은, 죽비 소리 같은 말씀이다.”(이광이 <절절시시>)
오두막 노파의 일갈에 정약용은 깨어났다. 주막 골방에 ‘마땅히 지켜야 할 4가지’란 뜻의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붙였다. 생각은 담백해야 하고, 외모는 단정해야 하며, 말은 적어야 하고, 움직임은 무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버림받은 자가 절망을 딛고 일어서려는 수신(修身)의 요체였다. 그리고 4년 동안 주막에 머물며 제자들을 들이고 책을 지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스려서 다산은 대학자가 될 수 있었다.
어려울 때 자신을 다스리는 자가 마지막에 승리한다. 분노는 결국 자신을 향한 것이다. 자신의 내부를 갉아먹는다. 정치인이라면 마땅히 민심에 길을 물어야 한다. 어려운 처지에 놓이면 민심을 얻으려 하지 말고 민심을 따라야 한다. 민심은 마지막에 현명하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일렀다.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
민주당의 공천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더 엄중한 대의가 있다. 지금 나라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헤아려봐야 한다. 정치는 최악을 피해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다. 국민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외로울수록 몸가짐은 의젓하게, 억울할수록 움직임은 무겁게 해야 한다.
박용진은 졌지만 이겼다. 오늘은 어제의 나이고, 미래는 오늘의 나이다. 지난날이 진정 정의롭고 치열했다면 그 속의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지 마라. 분노를 앞세우고 길을 나서지 마라. 오두막 노파가 말한다. “어찌 헛되이 그냥 사시려 하는가?”
김택근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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