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칼럼]선거 파노라마
한국이 총선을 한 달 앞둔 3월10일, 포르투갈에서 총선이 있었다. 2년 전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던, 안토니우 코스타가 이끈 중도 좌파 사회당 내각의 몇몇 장관을 비롯한 일부 고위관리들을 수뢰와 독직 혐의로 작년 말 검찰이 전격적으로 수사한 것을 계기로 내각이 총사퇴했다. 이에 따른 조기 총선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해변 마을은 총선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선거 벽보와 현수막으로 뒤덮인 서울 거리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선거 결과 예상대로 사회당이 많은 의석을 잃고, 중도 우파 사민당의 선거연합인 ‘민주동맹’은 신승했다. 충격적인 사실은 유럽에서 극우 포퓰리즘의 무풍지대로 여겨졌던 포르투갈에서 2019년 창당한 ‘그만해’라는 이름의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 ‘셰가(CHEGA)’가 18%의 득표율을 얻어 대약진한 것이다. 제3당인 이 극우정당이 이제 국정의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었다.
40여년에 걸친 살라자르 독재체제를 종식한 청년 장교단이 1974년 4월25일 ‘카네이션 혁명’을 일으킨 이후 나름대로 안착되었던 진보와 보수의 양강 구도에 균열이 생기면서 이 틈새를 극우 정치 세력이 메운 셈이다.
물론 여야를 막론한 기성 정치권의 부정부패도 원인이었지만 부동산 가격 폭등에 따른 주거환경의 심각한 문제가 큰 요인이었다. 2008년 포르투갈을 강타한 재정위기 때문에 정부는 외국인 투자자를 위한 ‘골든 비자’를 도입, 소득세를 10년간 면제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그런데 이 투자가 주로 리스본 수도권과 남부 해변 휴양지에 집중돼, 다른 나라에 비해 낮았던 부동산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리면서 저소득층은 벼랑에 몰렸다. 바로 이 주택 문제를 중점 공략하면서, 이와 함께 일기 시작한 외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와 앙골라나 모잠비크 등 과거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건너온 이주자에 대한 인종주의적 혐오를 뒤섞은 극우 포퓰리즘의 선거 전략이 먹혀들었다.
선거다운 분위기도 없는 속에서 이렇게 진행된 포르투갈의 정치적 변화를 보면서 반세기 이상 살았던 독일의 선거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선거 때 조용하기는 독일도 마찬가지다. 주로 지하철역 앞에서 몇몇이 자기 당의 홍보물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건네주는 것이 흔한 선거운동 풍경이다.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찢어질 듯한 금속성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당의 유니폼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연신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굽혀 인사하는 입후보자나 선거운동원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동맥경화’ 한국 정당정치 위기
한국과 다른, 선거 분위기의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선 정당 가입자 숫자는 한국과 비교하면 아주 적다. 포르투갈과 독일의 인구 대비 정당 가입자 비율은 2~3% 수준을 유지하는데 한국은 이의 10배 수준으로 국민 5명 가운데 1명 정도가 당원인 가히 1000만 당원의 시대를 맞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놀라울 정도로 정당에 쏟는 관심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곧 드러난다. 입당은 주로 선거 주기에 따라 나타나고 정치인의 단기적인 이합집산에 따른 입당이기에 대체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조건에서 가입 정당의 이념과 정책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과연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도 당연히 나오게 된다. 하루아침에 당적을 바꾸어 어제까지도 비판했던 상대편 당 소속이 되어 총선에 출마하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1981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엘리아스 카네티(1905~1994)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 <군중과 권력>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에 군중 속에 있을 때 안도감을 갖게 된다고 했다. 공포야말로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신의 심장박동이라고도 주장한다.
이어서 그는 계속 성장하는 ‘열린’ 군중과 외부적으로 ‘닫힌’ 군중을 구별한다.
전자는 지속해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의 존재 의미를 발현하지만, 후자는 빨리 성장하지 못하지만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다고 진단한다.
이 같은 관찰에 따른다면 정당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한국은 당원 숫자가 계속 불어 세를 유지해야만 하는 열린 군중이, 정당정치의 오랜 역사를 지닌 서유럽의 경우 현재 닫힌 군중이 움직이는 정치적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에서 특정한 계층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 성원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국민 정당’이나 ‘전천후 정당’이라는 개념에도 열린 군중 개념이 담겼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본격화된 산업구조 변화와 ‘탈교회’ 현상과 같은 생활세계의 급격한 변화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국민 정당 당원 수를 격감시켰다.
여기에다가 국민 정당이 추구하는 폭넓은 과제가 주로 중간지대를 겨냥하고 선거 전략상 유리한 어젠다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진보나 보수 거대 정당의 정강과 정책적인 차이도 점차 사라졌다. 이로 말미암아 정치가 줄 수 있는 신선한 매력도 사라지고 적지 않은 유권자들은 아예 투표장을 찾지도 않게 되었다.
한마디로 성장은 정지되었지만,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는 닫힌 군중의 정치 공간이 된 것이다.
나라에 따라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바로 이런 상황에서 사회 주변부로 추방된 계층은 극우 포퓰리즘에 적극 동의를 표하게 된다. 얼마 전 독일 총리 올라프 숄츠는 국민 정당은 이제 당원 수가 아니라 국민을 편 가르지 않고 사회 통합을 지향하는 의지의 여부가 본질적인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2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기록해 제3당 입지를 굳히는 극우 포퓰리즘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을 염두에 두고 그 나름으로 내린 국민 정당에 대한 정의로 보인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는 보수와 진보라는 양강 구도에 갇혀 동력을 잃는 정당 민주주의에 대한 경고등이 켜진 상황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지역주의까지 더해서 동맥경화증을 보이는 한국 정당정치 위기에 관해서는 그동안 진단도 많았고 해법도 많았다. 총선과 더불어 병립형, 연동형, 권역별 비례제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도 한 예다.
‘공정과 상식’ 의미 보여줄 계기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같거나 또는 비슷한 선거제도도 사회구조와 정치문화의 차이에서 비롯한 심한 편차와 굴절이 생긴다. 연동형 비례제도의 모범인 독일의 선거제도를 어느 정도 참고했다지만 독일에서는 들어볼 수 없는 ‘위성정당’의 출현이 바로 그렇다. 거대 양당 구조 속에 다양한 정치 세력의 운신 폭을 넓혀주기 위해 조성한 정치적 공간을 거대 양당이 다시 뒷문으로 들어와서 차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
거대 양당이 다시 첨예하게 격돌하는 구도 속에서 치러지는 한국의 이번 4·10 총선이 뿜어내는 열기는 50%를 겨우 넘긴 투표율을 보이는 이곳의 총선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멀리서도 느낄 수 있다.
한편에서는 검찰 독재와 민생 파탄의 책임을 묻고, 다른 편에서는 정치 안정과 종북 좌파 척결을 내세운 혐오와 증오에 찬 언어가 난무하고 있다. 언어가 인간 사이 소통의 수단이라는 견해처럼 큰 환상은 없다는 카네티의 경고가 새삼스레 떠오른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군중 또는 대중이라는 단어에서 ‘무리’를 뜻하는 중(衆)은 본디 여러 사람이 모여 구경하는 형상을 묘사하였다. ‘매스미디어’나 ‘매스게임’ 같은 단어처럼, 대중이나 군중을 의미하는 매스(mass)의 어원은 빵을 굽기 위해 여러 재료를 미리 짓이겨놓은 상태에 있는 ‘반죽 덩어리’라는 라틴어다. 행위자로서 주체가 없고 독립적인 구성 요소들도 이미 사라진 상태를 묘사하는 이 두 단어는 문화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보여준다. 단순한 집합체로 보편적인 규범을 창출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무리로서 군중이나 대중을 대하는 부정적인 시각이다.
이와 달리 현대사회 구성원으로서 국민은 무엇보다 선거를 통해서 정치 공동체의 운명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변화를 스스로 주도하는 주체이지 구경꾼 무리거나 반죽 덩어리처럼 이미 빚어진 것도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는 총선은 단순히 현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가 아니라 깨어 있고 행동하는 시민이 지금 쉽게 이야기되는 ‘공정과 상식’이 과연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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