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을 ‘다시 읽는다’

박송이 기자 2024. 3. 12.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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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정시 대표주자 미발표작 166편, 46년 만에 세상 밖으로
박목월 시인의 미공개 육필 노트들이 1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공개되고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장남 박동규·유작품발간위
육필노트 80권 분석 끝 공개
연작시 등 실험적 시도 눈길
한국전쟁 등 시대적 고찰도
원본 유지 위해 디지털 작업
전자책·전집·평전 발간 계획

한국의 대표적 서정시인인 박목월(1915~1978)의 미발표 작품 166편이 46년 만에 공개됐다. 이번 미공개 작품에서는 전쟁의 참혹함이나 해방의 기쁨 등 시대적 상황을 다룬 시들, 기존 짧은 형식이 아닌 장시(長詩)도 여러 편 발견돼 박목월의 작품세계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박목월 시인의 장남인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가 1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박목월 시인의 미발표 육필시를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목월 시인의 장남인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와 박목월유작품발간위원회(위원장 우정권 단국대 교수)는 12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박목월 시인이 남긴 다량의 미공개 육필 노트를 공개했다. 공개된 시 166편은 총 80권의 육필 노트에 수록된 460여편 중 미발표작 290편에서 문학사적 가치가 있고 완결된 시 형태인 작품들을 추려낸 것이다.

“절절 끓는 핏줄을 가진 자라면/ 이 겨레의 핏줄을 가진 자라면/ 바다에서 산에서 또한 들에서/ 일어나고야 만다/ 우리는 일어난다.”(결의의 노래)

“6·25 때/ 엄마 아빠가 다 돌아가신/ 슈샨보이/ 이 밤에 어디서 자나 슈샨보이/ 비가 오는데 잠자리나 마련했을가 슈샨보이.”(슈샨보오이)

이번에 공개된 작품은 그동안 알려진 박목월 시인의 작품과는 시풍이 다르다. ‘무제’ ‘슈샨보오이’ ‘결의의 노래’ 등은 해방과 한국전쟁, 미래 조국의 희망 등 역사적 격동기의 감흥을 다룬 작품들이다. 우정권 교수는 “박목월 시인은 목가적·서정적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번에 발굴된 작품 중에는 다른 경향의 작품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면서 “시대적 상황과 거리가 먼 작가가 절대 아니었다”고 말했다.

단형시가 아닌 장시, 연작시 등 기존과 다른 형식의 시들도 소개됐다. 육필 노트에는 ‘방문’ ‘폐문’ ‘심방’ 등이 연작시 형태로 수록돼 있다. 우정권 교수는 “‘폐문’ ‘심방’ ‘방문’은 한 권의 노트에 차례로 쓰여 있는데, 하나의 서사적 상황이 연작으로 구성돼 있다”며 “내용 또한 시적 화자의 ‘상대’가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 ‘상대’와 작별인사를 나누는 장면을 묘사해 극적 긴장감을 드러내고 있어 위원들이 ‘미스터리 스릴러물’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연구할 내용이 많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박목월 시인의 작품세계에서 한정적으로만 주목받았던 ‘생활시’도 여러 편 발굴됐다. 한겨울에 버스를 기다리는 삶의 고단함을 다룬 ‘무제’, 쉴 틈 없는 서울의 근대화를 다룬 ‘구두’ 등이 대표적이다. 전소영 홍익대 초빙교수는 “새로이 발굴된 시편들에는 근대화된 도시의 시공간 안에서 숨가쁘게 살아가면서도 가난과 고단함을 벗어날 수 없었던 ‘나’의 내면적 비애와 도시민들의 풍경이 드러난다”며 “중기 시 재평가의 매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종교시, 동시, 고향과 타향에서의 삶, 자연 풍경, 가족과 어머니 등을 다룬 작품들이 공개됐다.

육필 노트에는 시어를 수정하고 재배치한 흔적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동시 ‘놋방울 열두 형제’는 같은 이미지나 스토리가 여러 차례 시도돼 동시 한 편이 완성돼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박목월 시인의 대표작 ‘나그네’는 발표된 작품과 똑같이 쓰여 있다. 박 교수는 그동안 노트를 공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노트의 의미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버님이 왜 이 시들을 발표하지 않으셨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한 시인의 전 생애를 살펴볼 수 있으면서 시인의 창작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트에 실험적인 시들도 많았기에 공개를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는 “박목월 시인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노트 속에는 발표를 염두에 두고 있던 작품들도 많았을 것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위원회는 노트의 원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디지털 작업을 완료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자책을 발행하고 전집·평전을 발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인공지능(AI) 미디어 기술을 활용해 박목월 육성 시 낭송, 그림 및 동영상 미디어 등 콘텐츠 개발에도 나설 계획이다.

우 교수는 “김소월 시인과 윤동주 시인은 생전에 모든 작품을 발표하고 작고했으나 박목월 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이번에 공개된 작품들은 한국의 시인문학사를 다시 쓸 만한 문학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육필 노트는 그동안 경주시 동리목월문학관과 박 교수의 자택에 나눠서 보관돼왔다. 동리목월문학관에서 노트의 외형을 전시한 것 외에는 내용이 일절 공개되지 않다가 지난해 8월 이를 전면 공개해 새롭게 발간하려는 취지로 발간위원회가 구성됐고, 6개월간 분석 작업이 진행됐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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