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분다 [이상헌의 바깥길]

한겨레 2024. 3. 12.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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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욕망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와 만나면 그야말로 만발한다. 올해는 세계 곳곳에서 유독 선거가 많다. 이제 더 이상 욕망을 숨기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한때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나 ‘죽은 자의 이름으로’ 말했으나, 지금은 저쪽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공격하여 내 욕망의 우월함을 드러낼 뿐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이상헌 |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바람이 분다. 봄바람이다. 얼었거나 움츠린 것을 살려내기도 하고, 멀쩡한 것들을 미치게 만드는 바람이다. 시인들이 가만있을 리 없다.

박목월의 시는 자연스럽다. “기는 바람 지나면/ 파릇파릇 파란싹/ 나는 바람 지나면/ 울긋불긋 살구꽃”(‘봄바람’). 마치 봄바람의 마법에 봄이 열리는, 디즈니 영화의 익숙한 장면 같다. 어떤 시인은 이런 마법을 인간의 힘으로 되돌리기도 한다. 박노해는 “봄이 와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봄이 오는 것”(‘꽃샘바람 속에서’)이라며 특유의 의지적 낙관주의를 피워 올린다. 시인 안도현도 비슷하다. “때가 되면 봄은 저절로 온다고/ 창가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이 들판에 나오너라 (…) 일하는 손들이 끌어당기는/ 봄을 보아라”(‘봄’).

이 밝고 좋은 것들만 날리는 계절이니 회한도 커진다. 고려시대 문신인 우탁은 봄바람을 보고 늙음을 한탄했다. 하얀 눈을 녹이는 바람을 빌려다가 제 머리에 불게 해서 “귀밑에 여러 해 묵은 백발을 녹여 볼까 하노라”고 읊었다. 그러면 뭐 하랴. “한 손에 막대를 잡고 또 한 손에 가시를 쥐고/ 늙는 길을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을 막대로 치려 하였더니/ 백발이 제가 그것을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탄로가’). 그래도 우탁은 장수하여 무려 81살까지 살았다. 산을 가로질러 백발로 달려오던 봄바람 덕이었을 것이다.

이것 또한 누군가에게는 그저 미망일 뿐이다. 봄이란 대저 꽃이 만발하여 눈을 현혹하나, 발이 딛고 선 바닥에는 흙먼지만 자욱할 뿐이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봄날은 간다’). 이른 봄날에 죽은 기형도 시인은 이렇게 썼다. 봄바람은 아지랑이의 미혹이다. 마음의 풍경은 더 싸늘해서 서럽다. 장사익이 바람처럼 흐늘거리며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며 불러대는 것을 듣자면, 아무 사연 없는 이들도 봄날의 “얄궂은” 맹세 하나 찾아보게 된다.

이도 저도 아닌 봄날은 사소하고도 굳건한 일상의 틈새에 찾아드는 찰나 같은 숨결이다. 시인 이문재는 어느 봄날 철가방을 싣고 배달하는 청년이 위험하게 급브레이크를 밟아 넘어질 뻔한 걸 보았다. 그런 아슬함을 간단히 무시하며 “청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는다 (…) 백목련 사진을 급히 배달할 데가 있을 것이다”(‘봄날’).

또는, 시멘트 덩어리에 꽃이 피어나지 못하듯이, 일상의 봄날이라는 건 애당초 없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 이산하의 시집 ‘악의 평범성’에는 ‘봄’이라는 단어가 딱 두번 나온다. 한번은 “봄에 몸이 마르는 슬픔”에 관해 아파했고, 다른 한번은 “복사꽃 지는 어느 봄날”에 “네팔의 한 화장터”를 기억했다. 그 화장터에서도 가난한 시신은 자신을 태울 장작을 살 돈이 없어 절반만 탄 채 강물에 버려진다고 한다. 복사꽃과 함께 잿빛 강물로 둥둥 떠내려간다.

냉랭한 삶을 마주하기 싫은 봄바람은 욕망을 키운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하트 크레인의 시 ‘부서진 탑’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사랑이라는 환상을 찾아왔더니“바람 속 순간”뿐이더라는 시구절이 나오면서 주인공 블랑시가 등장한다. 때는 봄날이고, 바람은 불어댄다. 동생의 집을 찾아가는 길을 물으니, 사람들은 말한다. ‘욕망’이라 적힌 전차를 탄 뒤 ‘묘지’라 불리는 전차로 갈아타서 ‘극락의 들판’에 내려라. 그것으로 연극은 시작되고, 또 그것으로 끝난다. “나는 현실주의를 원하지 않아. 마법을 원한다고요”라며 날것의 마음을 드러내는 블랑시는 여동생과 그 남편의 또 다른 거친 욕망에 부딪힌다. 여동생은 자신의 남편에게 몹쓸 짓을 당한 언니를 정신병원이라는 ‘극락의 들판’에 몰아내고, 남편의 사랑을 갈구한다. 잔인한 봄을 그려낸 윌리엄스는 ‘봄 태풍’이라는 희곡도 쓴 적이 있다. 원제목은 엘리엇의 그 유명한 구절을 끌어와서 “4월은 잔인한 계절”로 했다고 한다.

봄의 욕망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와 만나면 그야말로 만발한다. 봄날의 선거란 억눌린 것을 훌훌 털어내거나 죽은 것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기적이기도 하나, 때로는 제 몸속에 숨겨두었던 은밀한 욕망을 벛꽃처럼 한껏 펼쳐대는 아수라장이거나, 더 속된 말로 ‘아사리판’이다.

추위가 혹독하지 않은 탓일까. 밋밋한 겨울 끝에 찾아온 올봄에는 비릿한 냄새가 배어 있다. 올해는 세계 곳곳에서 유독 선거가 많다. 이제 더 이상 욕망을 숨기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한때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나 ‘죽은 자의 이름으로’ 말했으나, 지금은 저쪽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공격하여 내 욕망의 우월함을 드러낼 뿐이다. 욕망들이 날치 떼처럼 시퍼런 바다 위를 날아다닌다. 그래서 “아름다운 봄”과 “불타는 사랑”을 노래했던 봄의 시인 하이네는 일찍이 말했나 보다. “많이 가진 자는 금방 또/ 더 많이 갖게 될 것이고/ 조금밖에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그것마저 빼앗길 것이다”(‘세상사’).

서울의 봄은 들떠 있다. 새로운 것의 흥분으로 발갛게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겨울 내내 묵혀둔 낡은 것들이 봄밭 거름더미 밑에서 삭혀진 매캐한 연기같이 퍼져나간다. 22대 국회의원 선거는 4월10일이고, 세월호 참사 10주년은 4월16일이다. 선거를 이유로 더 이상 죽음의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시인 김남주는 죽어서도 “그대는 봄다운/ 봄을 맞이하여 보았는가”(‘잿더미’)라고 계속 물을 것이고, 우리는 저마다의 “빼앗긴 들”을 분주히 말할 것이다. 가진 자의 ‘빼앗김’이 가장 큰 울분의 목소리가 된 세상에도 계절은 바뀌고 봄은 온다.

‘아사리판’의 다른 말은 ‘개판 오분 전’이다. 말의 기원에 대한 설이 분분하지만, 한국전쟁 시절 피난민들을 위해 준비한 밥솥이 열리기 오분 전이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굶주린 사람들이 제 차례가 오지 않을까 걱정해서 서로 앞서나가면서 난장판이 되었다. 이제 굶주림을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말을 개들이 난리 치는 상황으로 이해한다. 인간의 일을 두고 개를 탓한다.

다시 바람이 분다. 돌고 돌아서 그 바람이다. 김수영 시인이 그랬던가.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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