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같은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하종강 칼럼]

한겨레 2024. 3. 12.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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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외롭게 전태일기념사업회를 지켰던 활동가가 혼잣말처럼 쓸쓸하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솔직하게 이야기할게요. 전태일 열사가 여러 사람한테 도움 주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운동권이고 비운동권이고 기념사업회 활동이 약력에 들어가는 시대잖아요.” 벌써 20여년 전에 했던 말이다.
제53주기 전태일 추도식이 지난해 11월13일 오전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열사 묘역에서 열리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선생님이 모든 인터뷰에 일절 응하지 않고 계시던 시기에 찾아뵌 적이 있다.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전태일기념사업회’ 활동을 끈질기게 이어오고 있는 활동가가 동행한 덕분에 그나마 어렵게 성사된 자리였다. 선생님은 “너희들이니까 만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인터뷰하지 못하게 막으라 했더니, 지들이 하자고 하네”라고 입을 여셨다. 나에게는 “그 얘기를 또 하려면 내 속에 가라앉아 있는 구정물을 모두 헤집어 퍼내야 해서 며칠 동안 잠을 못 잘 텐데, 그래도 꼭 얘기해야 되겠소?”라고 물으셨고, 나는 뻔뻔스럽게 “네!”라고 답하며 녹음기를 들이밀었다.

집에 돌아와 다시 들어본 녹음테이프에는, 내가 화장실에 다녀오느라고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선생님이 활동가에게 귓속말처럼 물어보시는 말이 녹음돼 있었다. “어떻게 밥은 먹고 사냐? 나는 겁나서 못 가본다. 내가 뭔 할 말이 있나 싶어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가 ‘전태일기념사업회’에 차마 오시지도 못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며칠 뒤 그 활동가를 만났을 때 넌지시 물어보았다. “활동비는 나와요?” 기념사업회를 외롭게 지키고 있던 그이가 망설이며 답했다. “6년 동안 제대로 나온 달은 한번밖에 없었어요.” 내가 낸 세금으로 박정희기념관을 짓는다는 말이 나오던 무렵이었다. 전태일기념관을 ‘나랏돈’으로 번듯하게 지을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길을 걷다가도 목이 메었다.

얼마 뒤 그이는 더 열악한 단체로 옮겼고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큰 집에 살다가 작은 집으로 살림을 줄여 이사한 것처럼 어려운 결단을 했다”고 했다. 이소선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장례식을 치르면서도 그 활동가가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선생님의 죽음에 대해 온갖 명사들이 소감을 말하고 언론이 기사화했지만, 그 활동가의 이름은 어느 기사에서도 검색되지 않았다. 어느덧 세월이 지나 ‘전태일재단’도 설립됐고 ‘전태일기념관’도 ‘나랏돈’으로 번듯하게 지어졌다. 감개무량한 일이다.

몇 년 전, 일본 사람으로부터 내 책을 번역해 공부하는 모임을 시작했다는 편지를 받았다. 몇 달 뒤 일본에서 두툼한 소포가 하나 왔는데, 내 책을 번역해 장별로 분철하고 표지를 만들어 제본한 다섯권의 번듯한 소책자가 들어 있었다. 감격해서 한동안 말을 잃었다. 나의 또 다른 책과 한겨레 ‘하종강 칼럼’을 번역해 공부하는 모임을 다시 시작했다고 했다. 지난해 말 칼럼에서 “내년에 우리 나이로 칠순이 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일본에서 연락이 왔다. “칼럼 사진만 보고 젊으신 줄 알았는데 칠순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가까운 지인들도 잘 안 읽는 내 칼럼을 이역만리 바다 건너 일본에서 꼼꼼히 챙겨 읽는 열혈독자가 분명했다.

그 일본 사람이 보낸 긴 편지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지금 일본 노동자들에게는 급전락하고 있는 노동운동을 재구축하기 위해 한국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 민주노조운동에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현장에서 피땀 흘리는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헌사를 바치는 마음으로 읽었다.

그 일본 사람들 중 몇 사람이 며칠 전 한국을 방문했다. 모임의 대표 격인 사람이 마침 팔순을 맞았다고 해서 조촐하게 모였다. 오래전부터 한국에 올 때마다 이소선 선생님을 방문했고 청계피복 노동자들도 만나곤 해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모였는데, 내가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평화시장 노동자들도 있었다.

모임을 파하고 헤어지는데 그 노동자들 중 한분이 굳이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오래전 선생님과 두달 동안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돈 한푼 못 드린 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답했다. “이 사람아, 그때는 우리가 돈 받으면서 일할 때가 아니었잖아. 잡혀가지 않으면 다행이었던 시대였으니까 (…) 그래도 공부 끝나면서 점퍼 한벌 만들어줘서, 제가 겨우내 잘 입었어요.”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의 그 노동자는 끝내 몇 번이나 머리를 숙이며 “그래도 미안하다”고 했다.

전태일재단과 보수언론이 공동기획했다는 기사에 대해 여러 말이 오가고 있다. 마음이 착잡하다. 오랜 기간 외롭게 기념사업회를 지켰던 활동가가 혼잣말처럼 쓸쓸하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솔직하게 이야기할게요. 전태일 열사가 여러 사람한테 도움 주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운동권이고 비운동권이고 기념사업회 활동이 약력에 들어가는 시대잖아요.” 벌써 20여년 전에 했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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