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 안 가본 R&D의 길, 공감이 먼저다
최근 산학협력단장 역할을 하면서 많은 연구책임자들이 예산 삭감을 당했다며 한숨 가득한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를 자주 접하게 된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위원을 하다 보니 R&D 예산 삭감에 대해 과거를 반성하는 고육지책임을 공감하고는 있지만 예상대로 현장에서 느끼는 삭감의 현실 고통은 매우 아프다.
디지털 사회 특성상 즐거움은 전파 속도가 늦지만 고통과 분노의 확산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정부 입장에서는 예산 삭감을 결정한 만큼, 고통을 감내 중인 과학기술계를 적극적으로 달래고, 진정성 있는 소통을 통해 지금 조금만 함께 참으면 앞으로는 더 좋은 R&D 환경을 만들겠다고 설득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동안은 '질적 연구성과가 나쁘다' '모럴 해저드나 카르텔 문제도 있다' 등의 압박성 지적만 거듭됐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힘들고 아프다는 친구에게 공감해주고 위로해 주기보다 '너가 잘못해서 아픈거야'라는 얘기만 계속한 셈이다. 디지털 시대는 '공감'이 자산인데 과학기술계에 대한 공감 노력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예산 삭감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삭감보다는 '함께 힘들 때 허리띠를 졸라맵시다'라며 예산 동결을 유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짙게 남는다. 어차피 모든 결정에는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특히 국가 미래를 위한 중요한 정책결정은 모두가 공감할 수도 없다. 반대가 더 많은 경우도 수두룩하다. 남은 숙제는 더 나은 미래의 성취다. 단순한 예산 삭감이 목표가 아니라 R&D의 구조적 혁신과 선도적 R&D를 실현하는 일이 중요한 목표라서, 아프지만 예산삭감을 한 거라고 설득한 만큼 이제는 실천으로 그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정부의 기조가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과기수석을 신설해 가장 중요한 역할로 '현장과의 소통'을 강조한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따끔한 잔소리부터 미래를 위한 정책의 방향까지 최고 결정권자가 많이 듣고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정책 추진에 공감대를 키울 수 있다. 또한 과기부 차관급 교체를 통해 분위기를 쇄신하고 현장의 소리를 듣는 정책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한 것도 고무적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KBS 특별대담을 통해 '과학기술 발전을 통해서 미래를 준비한 대통령으로 남고 싶다'고 했다. 방송에서 이렇게 천명할 정도라면 강력한 실천 의지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걸 실물 정책으로 강력하게 추진하는 정부의 노력이 절실하다. 실제로 최근에는 연구 현장의 오랜 염원이었던 과학기술 출연연의 공공기관 지정 해제를 시행했고, 이공계 대학원생의 안정적 지원을 위한 한국형 스타이펜드(stipend) 지원 제도 마련 등 소통을 기반으로 낡은 규제는 철폐하고, 좋은 제도는 적극 받아들이는 등 차근차근 변화를 실천하는 중이다. 특히 미래의 주인공인 젊은 연구자들과 소통을 늘리고 그들을 배려하는 정책을 확대하고 있는 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직까지 예산 삭감의 아픔을 달래기에는 한참 멀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소통하고, 회복하고, 겸손하게 더 큰 미래를 준비하자고 꾸준히 실천하면 공감대는 조금씩 커질 수 있다.
최근 과학기술 경쟁력 분석 결과 처음으로 중국에도 뒤처지기 시작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선진국을 카피하는 개도국 방식으로는 성장할 수 없다. 선진국도 해보지 못한 새로운 영역에 도전장을 내미는 선도적 R&D로 전환해야 한다. 그것이 과학기술계가 이뤄야 할 가장 큰 숙제다.
'도전적이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R&D'를 시작하려면 많은 걸 바꿔야 한다. 일단 소통이 중요하다. 정부는 '무조건 나를 따르라'라는 개도국 방식의 정책을 버리고 현장의 소리를 많이 듣고, 전문가와 충분히 대화하며, 과학기술계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든 뒤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과거와 달리 어느 분야, 어떤 연구를 해야 할지 명확하지 않을 때 가장 중요한건 전문가들과 다각적으로 소통하며 합의(consensus)를 이끌어 내는 일이다. 이미 선도적인 R&D 분야에는 더 많은 자금을 투자할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다.
돈보다 소통이 먼저다. 대한민국 산업의 기적을 이끌어 온 과학기술계가 합심해 '미래를 위해 함께 뛰자'고 마음먹을 때 비로소 선도적 R&D 실현이라는 정부 목표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문명시대, 공감이 자산이다. 과학기술정책도 공감 자산 키우기부터 시작해야할 때다. 힘들지만 꼭 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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