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예측하며 셔터 누를 때 ‘사진의 힘’ 커진다”
[짬] 포토 저널리스트 강형원씨
‘포토 저널리스트’ 강형원(61)씨는 ‘엘에이(LA) 타임스’, ‘에이피(AP)’ ‘로이터’ 등 미국주류언론에서 30년 이상 사진기자로 일했다.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엘에이 타임스에서 일하던 1993년 ‘엘에이 폭동’ 취재로 생애 첫 퓰리처상을 받았고 세계 최대 통신사인 에이피 워싱턴디시 지국에서 사진 책임자로 일하던 1999년에는 ‘클린턴 대통령 르윈스키 스캔들’ 취재로 두 번째 퓰리처상을 받았다. 클린턴 대통령 말인 1999년에는 백악관 소속 사진가로 채용돼 이듬해 취임한 아들 부시 대통령의 첫 공식 사진을 기록했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영어 문화권에 알리는 사진 작업에 전념하려고 2019년 로이터에서 명예퇴직한 그는 2020년부터 한국에 머물며 포토 저널리스트로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재작년 나온 그의 책 ‘사진으로 보는 우리 문화유산’은 이런 노력의 결실이다. 영어와 한국어 두 언어로 기록한 이 책에는 ‘정문경’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등 한국의 대표적인 25개 문화유산이 담겼다.
지난 6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만난 그는 제주를 여러 차례 방문하며 찍었다는 성산일출봉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출봉에 걸맞은 일출 사진을 찍고 싶었어요. 포토 저널리즘의 목표는 한 번 보면 잊어버리지 못할 사진을 찍어, 우리 삶을 기록하는 거죠.”
그는 최근 한겨레교육(www.hanter21.co.kr)에서 ‘강형원 기자의 사진으로 영원한 순간 기록하기’ 동영상 강의를 시작했다. 모두 360분 분량이다. 강의 주제는 “사진을 비전공한 사람이 터득한 시각적 문해력 키우는 방법”이다. “사진의 스토리 전달력은 압도적입니다. 포토 저널리즘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사람으로서 사진을 언어의 도구로 어떻게 써왔는지 전달하려고 합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 정치외교학과 4학년 때인 1986년 엘에이 타임스 인턴으로 포토 저널리즘 세계에 입문했다. 애초 물리학을 전공했으나 대학에서 인문학 강의를 들으며 깊은 흥미를 느껴 2학년 때 전공을 바꾸었단다.
첫 퓰리처상 수상작은 그가 말하는 ‘압도적인 포토 저널리즘의 힘’의 예라고 할 만하다. 1992년 4월 인종차별에 분노를 느낀 흑인들이 엘에이 전역에서 항의 시위에 나서 한인타운 가게들도 큰 피해를 봤는데 당시 그가 찍은 사진 한 장은 폭동 종식의 한 계기로 작용했단다. 사건 이틀째 폭도로 오인당해 사망한 한인 이재성군의 유혈 낭자한 모습을 그가 단독으로 취재해 다음 날 엘에이 타임스에 크게 실리자 미국의 유력 방송과 신문이 이 사진을 일제히 받아 보도했고 이어 흑인 사회의 시위 자제 촉구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사건 발발 뒤 바로 자원해 한인타운으로 달려간 그는 가게를 지키려고 총을 든 한인 남성들 사진을 송고해 반향을 얻었다. “전에는 미국 미디어나 영화에서 동양 남성은 한결같이 비겁하거나 연약한 모습이었어요. 그러다 엘에이 폭동에서 한국 남성들이 총을 들고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모습이 비쳐지면서 영어 문화권에서 동양 남성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기 시작했죠.”
33년 동안 미국서 사진기자 활동 ‘엘에이 폭동’ ‘르윈스키 스캔들’ 취재로
93년과 99년 퓰리처상 두차례 받아
“결과보다 과정 중시하는 사진을”
지난 4년 한국 문화유산 기록 작업
한겨레교육에서 사진 동영상 강의
그는 당시 천 명이 넘는 신문사 기자 중 유일하게 한국어를 하고 또 한인타운 지리도 꿰고 있었다. 스페인어와 중국어도 능숙했다. 두렵지 않았냐고 하자 그는 “당시 상황이 너무 믿기지 않아 제대로 기록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들어 그 역할을 제대로 하려고만 했다”고 답했다.
그가 ‘1면 사진 에디터’까지 지낸 엘에이 타임스 1987년 7월10일치 1면에는 전날 이한열 열사가 5·18묘역에 묻히는 사진이 실렸다. 물론 그의 사진이다. 87년 5월 엘에이 타임스 기자가 되고 불과 한 달 뒤 그는 한국의 6월 항쟁 취재에 나섰다. “그해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가 나온 뒤 아버지가 뭔가 큰일이 날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그 말에 한국 상황을 더 공부해 신문사 국제부장에게 사진 취재를 해보고 싶다고 제안했죠. 따로 사진취재를 자원하는 기자가 없었는데 제가 나서니 국제부장이 고마워하더군요. 기한을 정하지 않고 출장을 떠나 49일 동안 아버지가 사준 방탄조끼를 착용하고 취재했죠.” 2년 전 세상을 뜬 그의 부친(강대양)은 전두환 정권 시절 미국 망명 중이던 고 김대중 대통령 후원단체인 인권문제연구소 서부지회장을 지냈고 엘에이에서 ‘자유한국방송’(Free Korea Network-TV)을 운영했다.
대학 일간지 학보사 기자 시절 역동적인 스포츠 사진을 찍으며 포토 저널리즘 세계에 빠져들었다는 그는 포토 저널리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현재 상황을 찍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미래를 찍고 있어요. 현재 사진으로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고 사진 취재를 할 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요.”
그가 1997년부터 2년 동안 이끈 에이피 워싱턴지국 사진부 16명이 함께 퓰리처상을 받은 르윈스키 스캔들 취재는 포토 저널리스트의 예지력이 빛을 발한 대표적인 예일 듯하다. “(클린턴 대통령 성추문인) 르윈스키 스캔들과 관련된 여러 인물이 어떻게 생겼고 (관련 뉴스에) 어떤 자세를 취하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시각적으로 차별화해 보여주려고 했죠.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창의적인 사진을 찍으려고 했어요. 남들이 이미 찍은 사진을 모방하는 것은 쓰레기에 불과하거든요.”
그는 사진 기자로 레이건부터 오바마까지 모두 5명의 미국 대통령 취재를 했다. 인상적인 기억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가까이에서 미국 대통령의 찐 모습을 봤는데요.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들이 일단 대통령이 된 뒤에는 정파적 태도에서 벗어나 나라의 모든 사람을 대변하고 책임지려는 모습이었어요. 하지만 트럼프가 된 뒤에는 이런 미덕이 사라졌죠.”
그 생각에 저널리즘의 핵심 역할은 독자들의 분석적 사고력 키우기이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행간을 읽어 오류를 찾아낼 수 있을 때 현명한 인간이 될 수 있죠.” 그렇다면 한국 언론은 제 역할을 하고 있을까? “비논리적인 내용이 많고 객관적이지도 않은 주장을 너무 강하게 하는 것 같아요.”
인터뷰를 끝내며 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는지 물었다. “오래전부터 영어 지식세계에 우리 정체성을 보여주는 콘텐츠를 남기고 싶었어요. 콘텐츠가 너무 빈약하거든요. 로이터 퇴임 무렵 아이들이 성장해 둥지를 떠나 실행할 수 있었죠. 관에서도 할 수 있지만 저처럼 민간에서 자본의 제약을 받지 않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면 후세대가 우리 시대를 기억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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