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학습자’도 함께 사는 세상…경계선지능 청년 ‘여유토끼’의 꿈
장애인 지원은 못 받는데 취업 등 불이익
“우리 주위에 경계선지능인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세요. 아직 저희의 존재 자체도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난 9일 오전 강원도 춘천시 ‘커먼즈필드 춘천’에서 열린 ‘경계선지능인과 함께하는 토크 콘서트’에서 바다(가명·29)씨가 간곡하게 호소했다. 바다씨는 “또래들은 다들 취업하고 자리를 잡아가는데 나만 이력서 한줄 쓸 게 없다. 서류는 다 붙는데 면접에서 경계선지능인이라고 고백하면 100% 떨어진다. 한번은 이 사실을 숨기고 면접까지 합격했지만, 출근 첫날 다소 느린 행동 등의 이유로 바로 잘렸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자꾸 자신감이 없어지고 주위 눈치만 보게 된다”고 했다.
소설가 등 다양한 꿈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현범(가명·21)씨는 “일상적인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지만 다가가서 말을 걸면 상대가 당황할까 봐 주저하게 된다. 이 일이 끝나고 아르바이트에 도전해보려고 하는데 잘할 수 있을지 벌써 걱정”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바다씨와 현범씨가 어려움을 토로하자 장지순 마음소리심리상담소장은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은 누구나 힘들다. 대한민국에도 5천만명이 살지만 세밀하게 살펴보면 속도가 다 다르다. 느린 학습자들이 경험과 지식을 쌓을 수 있도록 참고 기다리는 국민들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토크 콘서트가 끝나자 커먼즈필드 춘천은 경계선지능 청년들이 직접 기획하고 제작한 팝업 스토어로 변신했다. 참석자들은 경계선지능 청년이 직접 만든 핸드 드립 커피를 마시면서, 또 다른 경계선지능 청년이 쓰고 디자인한 책을 읽었다. 또 식물을 통해 느림의 미학과 생명 탄생을 경험할 수 있는 화분도 샀다. 자신을 ‘여유토끼’라고 소개한 경계선지능 청년은 시민들에게 줄 커피를 내리면서 “나는 다른 토끼처럼 빠르진 않지만 매우 신사적이다. 항상 여유롭고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안다. 만약 누군가 ‘너는 왜 다른 토끼처럼 빠르지 않니?’라고 묻는다면 ‘신사는 걸을 뿐, 뛰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이날 토크 콘서트와 팝업 스토어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번번이 좌절을 겪는 경계선지능 청년들의 삶과 경험을 시민들과 나누고, 다양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경계선지능인지원센터 ‘느린소리’가 마련했다. 유은민 느린소리 사업홍보팀장은 “경계성지능 청년 5명이 ‘천천히 직진하는 사람들’이란 뜻을 담은 ‘천직사’란 모임을 꾸려 이번 토크 콘서트와 팝업 스토어를 함께 준비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재능을 통해 ‘느림의 미학’을 지역 주민들에게 선물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2021년 12월 구성된 경계선지능인지원센터 느린소리는 지적장애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평균 지능에 미치지 못하는 인지능력을 가진 ‘경계선지능인’ 청년의 자립에 초점을 맞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지능지수(IQ) 71~84 사이로 ‘장애 정도 판정 기준’에 명시된 지적장애 기준(지능지수 70 이하)에 해당하지 않아, 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장애인복지법’ 등 관련 법령에 의한 지원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평균 지능(85~115)에는 미치지 못해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학습 부진아’ ‘사회 부적응자’ 등으로 낙인이 찍힌 채 차별과 불이익을 받으며 살고 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톰 행크스가 연기한 주인공도 지능지수 75인 경계선지능인이다.
바다씨와 현범씨와 같은 경계선지능인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있는지는 제대로 된 실태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지능지수 정규 분포도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약 13.59%가 경계선지능인으로 추산되는데, 국내에만 700만명 정도다. 이들을 생애주기별로 지원하기 위해 지난해 4월 허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춘천·철원·화천·양구갑)이 지원법을 대표 발의했지만 아직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최수진 느린소리 센터장은 “유독 우리 사회는 느림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경계선지능 청년들은 사회적 인식 부족과 여건 부재로 자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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