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쌍릉은 무왕 이전 백제 왕의 무덤? 또 다른 반박 제기된 쌍릉 논쟁

노형석 기자 2024. 3. 1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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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
2018년 발굴조사 뒤 공개된 익산 쌍릉 대왕묘 석실 내부 모습. 관을 받치는 시상대가 바닥에 놓여있다. 석실 단면은 육각형을 띤 것이 특징이다. 한겨레 자료 사진

신라 향가 ‘서동요’는 7세기 초 나온 신라 백제 선남선녀 사랑꾼들의 연애담이다. 경주의 신라 선화공주가 남몰래 시집가서 훗날 백제 무왕이 된 익산 고을의 마 캐던 청년 서동을 밤에 만나 안고 간다는 야릇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옛 노래의 사연이 깃든 실제 역사의 현장으로 최근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곳이 있으니 바로 전북 익산시 석왕동 숲 속에 자리 잡은 두 기의 무덤 ‘쌍릉’이다. 7세기 초 사비성(부여)에서 금마저(익산)으로 도읍을 옮긴 주역이란 통설이 나오는 백제 무왕(?~641)이 쌍릉의 큰 무덤인 대왕릉에, 그의 배우자가 됐다는 선화공주는 작은 소왕릉에 잠들었다고 전해져왔는데, 2017~2019년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이런 설이 상당부분 사실이라는 조사단의 발표가 나왔다. 대왕릉은 1917년 일본 학자 야쓰이 세이이쓰가 처음 조사해 치아와 목관의 관재, 토기 등을 발굴했고,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100년 만에 2017년 재발굴을 벌여 무덤 안에서 정체불명의 인골들을 채운 나무상자를 발견했다. 이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 등을 써서 수습된 인골 일부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인골의 정체가 ‘620~659년 숨진 60~70대 이상 노년층 남성의 것으로 드러났고, 이런 정황에 부합하는 당대 백제 왕은 600년 즉위해 641년 숨진 무왕이 유일하다는 결과를 공개한 것이다. 소왕릉도 2019년 발굴했으나 선화공주임을 입증할만한 유물들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이 무덤의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채 선화공주의 것이란 설만 더욱 무성하게 나오는 중이다.

2020년 12월18일 서울 고궁박물관에서 공개된 익산 쌍릉 석실 인골. 연구진은 당시 설명회에서 과학적으로 인골을 분석한 결과 7세기 초중반 숨진 60~70대 이상 노년층 남성의 것으로 드러났고, 이런 정황에 부합하는 당대 백제 왕은 600년 즉위해 641년 숨진 무왕이 유일하다고 밝혔다. 한겨레 자료사진

5년이 지난 올해 새 봄, 이와 관련해 한 소장연구자로부터 파격적인 반론이 제기돼 학계가 술렁거리는 분위기다. 일제강점기 야쓰이의 발굴 유물들과 조사 자료들을 소장한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지난 2015년 야쓰이의 조사 100년 만에 쌍릉 발굴보고서를 펴낼 당시 학예실장으로 집필에 참여했던 이주헌 전 학예연구관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보고서 논고에서 1917년 대왕릉 석실 발굴 당시 이가 20~30대 여성의 것이고 바닥에서 수습된 토기도 신라계란 근거를 대어 무왕이 아닌 ‘선화공주 매장설’을 제기하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주장은 이후 익산시와 최완규 원광대마한백제연구소장 등 다른 연구자들을 자극해 인골발견과 무왕의 신원 확인으로 이어진 쌍릉 발굴을 촉발하는 후과를 낳았다. 이후 발굴조사 과정에서 자신의 설이 사실상 논박당하게 된 이씨는 지난 8일 동국대에서 열린 한국목간학회 학술발표회에서 ‘출토문자로 본 능산리형 석실의 역연대와 주인공’이란 논고를 내어 무왕으로 거의 굳어지는 듯한 현재 쌍릉 대왕릉의 주인공 문제에 대해 무왕의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무왕릉은 부여 능산리에 있다면서 본격적인 반박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5년 만에 나온 이 반박논고의 요체는 지난 30여년간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이전 명칭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과 ‘부여 왕릉원(이전 명칭은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숱하게 발견된 왕릉급 고분들의 발굴과정에서의 고고학적 맥락과 출토품의 문자기록 및 형태양상, 무왕을 비롯한 백제왕들의 장례와 부장품에 대한 문헌기록 등 다양한 관련 자료들을 도외시한 채 인골에 대한 과학적 분석 등에만 치중해 쌍릉 대왕릉의 무왕 주인공설을 고착시켰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쌍릉의 대왕묘 목관 안에서 1917년 첫 조사 당시 출토된 금옥대의 일부 장신구들. 지난 2015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간행한 일제강점기 쌍릉 발굴조사 보고서에 실린 도판이다.

그는 우선 왕찰로 추정되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나온 아치형의 창왕(위덕왕)명 사리감(사리를 보관하는 용기)과 모죽임의 사다리형 지붕을 한 부여 왕흥사터 석제 사리감의 지붕뚜껑, 최근 복원된 익산 미륵사터 서석탑의 심주석 내부의 사각형 구조 등을 주목해 이런 사리 장치들의 구조적 특징이 송산리 고분과 능산리 고분군의 왕릉급 석실 구조에 그대로 전이된 것으로 파악한다. 이를 토대로 부여 왕릉원의 10여개 고분들도 시기별로 천장의 구조를 아치형, 육각형, 사각형으로 나눌 수 있고 쌍릉 또한 그런 모델로 대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8년 발굴조사 뒤 공개된 익산 쌍릉 대왕릉 석실 내부 모습을 보면, 관을 받치는 시상대가 바닥에 놓여있는데, 석실 단면은 6세기 말~7세기 초의 육각형을 띠고 있어서 7세기 중반 숨진 무왕보다 시기가 앞선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대왕릉과 소왕릉도 크기만 차이가 날뿐 무덤 단면 모양, 구조 등이 거의 같아 비슷한 시기 무덤 주인이 잇따라 급사해 만든 것이란 해석을 냈다. 이런 해석에 따른다면 쌍릉의 두 무덤 주인은 무왕의 선대로 일찍 숨진 혜왕과 법왕이고 무왕은 수평 천정을 지닌 부여 왕릉원의 가장 늦은 시기 무덤 동하총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커진다.

쌍릉의 대왕묘 목관 안에서 1917년 첫 조사 당시 출토된 금옥대 허리띠 장신구들도 무왕 주인설을 가로막는 문제적 유물로 지목된다. 북조~수나라 고급관리들이 사용한 옥대 허리띠와 같은 계통의 것으로 보이는데, 이씨는 금옥대 허리띠는 당 현경 1년(656년)에 제정된 의복제도에서 처음 문무백관에게 적용되었으므로, 그보다 훨씬 전인 641년 세상을 떠난 무왕이 재위했을 때나 장례 때 금옥대허리띠를 당에서 입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무왕은 당에서 2품 관리에 해당하는 칭호를 받았으므로 당 고조 황제(618~626)대에 제정된 의복제에 따라 1·2품이 착용하는 금대를 착용했기에 이런 부장품이 나올 수 없다는 얘기다.

이씨는 쌍릉 대왕릉의 무덤 주인이 무왕임을 드러내는 결정적 근거로 제시됐던 대왕릉 출토 넓적다리뼈 인골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 (14C) 측정 결과도 객관성이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베타연구소와 국내 연구소 두곳에 연대 측정을 의뢰해 인골 당사자의 사망시점 추정 기한을 620년~670년으로 잡은 1표준편차(1ϭ/68.2%) 측정치와 600~680년으로 좀더 넓게 잡은 2표준편차(2ϭ/95%) 측정치를 같이 자료로 받았는데, 기한폭이 좁은 1표준편차 측정치만을 기준으로 무왕 주인공설과 직결되는 대왕릉 축조시점의 근거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연대기한에 재위 및 사망 시기가 들어맞는 백제 왕이 무왕(641년)뿐이란 점에서 다른 왕들의 가능성이 차단돼 되려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견해다. 반면 2표준편차 측정치 자료의 연대기간에 사망한 백제 왕에는 무왕 외에 위덕왕(598년)과 혜왕(599년), 法王(600년), 의자왕(660년)이 같이 들어간다. 중국에 끌려가 숨진 마지막 의자왕을 제외한 네 왕이 모두 무덤 주인공일 가능성이 검토되어야 논리적이라는 말이다. 이씨는 “국제학회 및 국내 고고학계에서는 2표준편차 측정치 값에 의한 결과를 신뢰가능한 연대로 활용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를 젖혀놓고 1표준편차 측정치만으로 대왕릉 축조시점을 파악하려는 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왕릉에서 수습한 인골의 연령이 법의인류학적으로 50세 이상의 남성 노인으로 판단된다는 발표 내용을 그대로 인정할 경우 무왕은 적어도 10대 초반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봐야하는데, 익산 지역에서 가난한 어머니 슬하에 자란 것으로 전해지는 서동이 어떻게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무왕이 됐는지는 해명해야할 문제가 적지 않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처럼 다른 고분, 사리장치와의 고고학적 발굴결과와 중국 고대문헌과의 비교를 통해 단계론적으로 쌍릉의 주인공 문제를 접근한 이씨의 연구방식에 대해 무왕설을 굳게 주장해온 이병호 동국대 교수와 쌍릉을 발굴한 이문형 원광대 연구원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사리감의 양식과 보수적인 무덤 석실 양식은 앞서가는 것과 오래된 것이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는데 수학적이고 기계적인 단계론적 가설로 쌍릉의 피장자 문제를 설명하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재반박했다.

5년만에 고심끝에 내놓은 이씨의 반론은 기존 연구에서 다소 미진했던 고고학적 유사사례의 분석과 문헌 탐구의 빈틈을 파고든 것이다. 이에 대한 기존 무왕설 지지 학자들의 논박이 어떻게 지속될지 학계가 주목하고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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