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전사극의 홍수 속 ‘정통 대하사극’으로 승부를 보다···‘고려거란전쟁’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이 지난 10일 종영했다. <고려거란전쟁>은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없는 퓨전 사극, 애초에 역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판타지 사극들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나온 보기 드문 ‘정통 대하사극’ 이었다. 총 32부작이 나가는 동안 중반에 잠시 부침이 있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오랜만에 시청자들에게 ‘사극 보는 재미’가 무엇이었는지 일깨워줬다는 호평이 많았다. 수익성이 떨어져 방송사들이 잘 만들지 않게 된 정통 사극도 경쟁력있는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고려거란전쟁>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인물’이 아닌 ‘사건’을 선택한 영리함
<태조 왕건>(2000) <불멸의 이순신>(2004) <정도전>(2014) <태종 이방원>(2021) 등 그동안 정통 사극들은 대부분 특정 ‘인물’에 관한 것이었다. 역사적 인물의 삶이 극의 소재이자 주제이다 보니 해당 인물에 관심이 없는 시청층은 애초에 끌어들이기 어려웠다. 수십 편에 걸쳐 그 인물의 생애가 펼쳐지는 과정에서 인물을 미화한다는 비판, 극의 전개가 느리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쉬웠다.
<고려거란전쟁>은 정통 사극으로서는 독특하게도 특정 인물 대신 ‘사건’을 소재로 삼음으로써 이런 문제들을 거의 피해갔다. 강감찬(최수종)과 현종(김동준)이 주요 등장인물이긴 하지만 드라마의 큰 줄기는 전쟁 그 자체다. ‘전쟁이 왜 발생했는지’ ‘어떻게 전개됐는지’ ‘결과는 어땠는지’가 중심이 되면서 이야기의 전개 속도도 다른 사극보다 빨랐다. 사극에는 큰 관심이 없던 젊은 층에서도 <고려거란전쟁>이 화제가 된 이유다. 그동안 많은 사극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했던 것과 달리 ‘고려’라는 상대적으로 잘 다뤄지지 않은 시기의 역사를, 그리고 ‘승리한 전쟁’을 소재로 잡은 것도 영리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고려거란전쟁>은 실제 일어난 사건을 정통 사극이라는 포맷으로 잘 보여줬다”며 “고려나 상고사로 갈수록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 사건이 많기 때문에 대중들의 궁금증도 높다”고 말했다. 드라마 중반 이후 현종을 해하려는 가상의 인물 ‘박진’이 등장하고, 황실 내 권력 암투를 그리는 회차가 늘어나자 역사 왜곡 논란과 함께 ‘극이 재미없어졌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역사에서 잊혀진 인물을 조명
독특한 소재 선택은 역사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들을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시청자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캐릭터인 양규(지승현)가 대표적이다. 수많은 전투에 앞장섰고, 포로가 된 백성 수만명을 구해 낸 양규라는 실존 인물은 이번 드라마를 통해 처음 대중들에게 이름이 각인됐다.
<고려거란전쟁>은 우리나라가 승리한 전쟁을 소재로 다루면서도 영웅적으로만 소비하지 않는다. 전쟁의 승패만큼이나 드라마가 주목하는 것은 전쟁의 고단함이다. 밤을 새워 싸우다 저도 모르게 깜박 조는 군사들,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는 순간에게도 서로에게 ‘좀 자고 오라’ 는 말을 건네는 사람들,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어느새 해가 뜨고 있는 장면들. 이런 장면을 통해 시청자들은 전쟁은 짧고 굵게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이어지는 고통이라는 것, 그 과정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보통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드라마의 대미인 귀주대첩 장면에서조차 카메라는 강감찬의 얼굴보다 이름없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병사들은 항상 용감하진 않다. 앞으로 달려나가 싸우길 주저하고, 도끼를 들고 달려오는 적군을 보고 공포에 질려 도망친다. 현대인들은 귀주대첩을 ‘강감찬의 공’으로만 기억하지만, 이런 장면을 보면 드라마의 제목이 왜 ‘강감찬’이 아니라 ‘고려거란전쟁’인지 짐작할 수 있다.
김선영 TV평론가는 “<고려거란전쟁>은 전쟁의 스펙타클함만 보여준 것이 아니라 <왕좌의 게임>처럼 전쟁신을 그리면서도 전쟁이 얼마나 처절한가에 대해 초점을 맞춘 것 같다”며 “장수들은 영웅이지만, 영웅적 묘사가 전쟁의 참혹함보다 앞서지 않았다. 박진감 넘치는 전개 속도, 이전과는 다른 전쟁 묘사가 호평 요인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공영방송이어서 가능했던 정통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은 KBS가 ‘공영방송’이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사극, 그 중에서도 정통 사극이야말로 수익성이 떨어져 요즘은 잘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긴 제작기간, 대규모 등장인물 등 보통의 드라마보다 시간적, 금전적 비용이 훨씬 많이 든다. 게다가 사극은 간접광고(PPL)가 어려워 재원마련이 어렵다. <고려거란전쟁>에 들어간 총 제작비는 270억원 이상이다.
이런 정통 사극은 또 나올 수 있을까. 김헌식 평론가는 “대중문화는 한 번 성공사례가 나오면 연달아 새로운 시도가 일어나기 때문에, 이렇게 팩트에 기반한 정통 사극들이 어느 정도 힘을 받을 것 같다”고 했다.
정통 사극 문법을 다양화 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김선영 평론가는 지난해 큰 인기를 끈 MBC <연인>을 예로 들었다. 그는 “역사 속 인물들만 다룬다고 해서 정통 사극인 것은 아니다”라며 “<연인> 속 인물들은 가상이었지만, 역사적 사실인 병자호란은 정통 사극에 가까운 문법으로 다뤄졌다. 기존 역사에서 소외됐던 피란민들을 이야기들을 발굴해 새로운 것을 만들었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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