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미공개 시 166편 공개…"서정시 넘어 새로운 면모"
[서울=뉴시스]신재우 기자 = "어머니께서 보따리에 보관하던 육필 노트를 젊은 학자들에게 평가받고자 이 자리에 나오게 됐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박목월(1915~1978)의 미공개 시 166편을 공개하는 자리에서 박동규(박 시인의 장남) 서울대 명예교수에게는 고민이 가득했다.
박 교수는 아버지의 타계 이후 45년간 갖고 있던 육필 노트를 살펴보면서 "시집을 내실 때 굉장히 어려워하셨는데 (노트에 적힌 시들이) 발표하기가 싫어서 안 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한 시인의 생애를 보는 데는 필요한 자료로 보였다"며 "누가 될까 걱정했지만 (시를 쓰는) 과정도 시이기 때문에 용기를 냈다"고 심경을 드러냈다.
1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는 총 80권에 달하는 육필 노트를 분석하고 새롭게 발간하려는 취지로 구성된 발간위원회의 박덕규 단국대 명예교수, 우정권 단국대 교수, 방민호 서울대 교수, 유성호 한양대 교수 등이 참석해 미공개 작품들의 문학사적 의미를 설명했다. 지난해 8월 구성된 위원회는 6개월의 분석 작업을 거쳐 총 290편 가운데 166편을 추려냈다.
우정권 교수는 이에 "노트의 기록은 대체로 시인으로 공식 등단하던 1939년 무렵부터 타계 전까지 활동하던 거의 전 생애에 걸친 것으로 파악된다"며 "기존 발표 시를 제외하고 완성도, 주제성, 첨삭 과정의 의미 등을 중심으로 (공개할 작품을) 선별했다"고 기준을 설명했다.
"박목월 시인이 왜 시집을 낼 때 이 시들을 고르지 않았을까 추정해 보면 독자들이 바라보는 작품적 경향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박목월의 시는 서정적인 것인데 (노트를 살펴보면) 사실 시대적 상황과 아주 거리가 먼 작가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에 공개된 시들은 그간 '나그네'로 잘 알려진 박목월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다.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서 향토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자연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던 박목월이 가족에 대한 사랑과 일상적인 삶, 신앙 등에 대해 쓴 내용이 담겼다.
"6.25때/엄마 아빠가 다 돌아가신/슈샨보이./길모퉁이의 구두를 닦는 슈샨·보이//곱슬머리가 부룩송아지처럼/귀연 슈샨·보이//학교길에서 언제나 만나는/슈산·보이.//이밤에 어디서 자나 슈샨·보이/비가 오는데, 잠자리나 마련 했을까. 슈샨·보이/누구가 학교를 보내주는 분이 없을가. 슈샨·보이/아아 눈이 둥그랗게 아름다운 그애 슈샨 보이/학교 길에 내일도 만날가 그애 슈샨보이." (박목월 '슈샨보오이')
대표적으로는 6.25 전쟁 당시 고아가 된 구두닦이를 그린 시 '슈샨보오이'가 있다.
방민호 교수는 "6.25 전쟁의 참혹한 경험을 뒤로 하고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소년의 모습을 그린 시는 완성도가 높고 단연 주목해 볼만한 시"라며 "시인으로서 어린 소년을 보는 연민의 마음을 잘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이 외에도 동시적 운율과 리듬을 갖고 있는 초기 시 '산골호수', 슬픔과 상실의 정서를 가진 '눈물', 일상적 삶을 담은 '어머님, 당신의 눈물 어린 눈동자에' 등이 모두 이번에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공개된다.
박덕규 교수는 "동시로 분류할 만한 시들의 경우 오늘날의 시로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그 당시로 보면 수준이 높은 동시"라며 "박목월 시인의 경우 동시에 있어서는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고 초기작의 의미를 설명했다.
45년의 세월 동안 노트는 박동규 교수의 자료 더미 속에 숨겨져 있었다.
박 교수는 "아버지의 노트는 어머니께서 따로 정리해 두셨고 6.25 전쟁 당시에도 천장에 숨겨두면서까지 보관했는데 어머니께서 20년 전에 작고하시고는 보자기에 쌓여있는 노트에 뭐가 써있는지도 모르고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뭐하러 냈노' 그러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솔직히 겁도 납니다."
박목월의 새로운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이번 미공개 시를 바탕으로 위원회는 원본을 디지털화해 공개하고 전자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우 교수는 "원본성을 높이는데 초점을 두려고 한다"며 "이후 노래 창작이나 뮤지컬 제작 등 2차 창작이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작품을 공개한 이후의 몫은 문학 연구자와 애호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논문이 쏟아지지 않을까도 기대해보게 되고요."
☞공감언론 뉴시스 shin2roo@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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